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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간 30분의 감동…연극 한편의 놀라운 힘
7시간 30분의 감동…연극 한편의 놀라운 힘
  • 노이정 연극평론가
  • 승인 2006.06.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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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비평_레프 도진의 ‘형제자매들’(LG아트센터, 5.20~21)

얼마전 내한한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의 ‘형제자매들’에 쏟아졌던 관심만큼이나 그 여파가 적지 않다. 연극 한편이 이토록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깨달음을 줄 수 있을까. 레프 도진이 연출한 이 작품에서 우리는 사라져가고 있는 연극의 힘을 재발견했다. 특히 우리 연극인들에게 반성의 거울이 됐다. 배우들, 극작가들, 연출가들에게 이 연극은 우리가 연극에 담긴 가능성을 얼마나 지레 포기하고 있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이렇게 쉬우면서도 감동을 줄 수 있다니!


1985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기 직전 초연해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순회공연을 해온 이 작품은 말리극장의 예술감독으로서 레프 도진의 초기작이다. 스탈린 시대 러시아 북부 아르항겔스크 지역을 배경으로 한 아브라모프의 소설 4부작 중 앞의 3부(‘형제자매들’(1958), ‘두 해 겨울과 세 해 여름’(1968), ‘길과 갈림길’(1978))를 연극화했다. 공식적으로는 2년 간 준비했다지만 1977년 배우들과 함께 아브라모프가 살고 있는 마을을 직접 찾아가 생활하는 등 도진의 고백에 따르면 준비기간은 10년에 이른다.


공연 전 우리가 주목했던 건 7시간 30분(순수 공연시간 5시간 20분)이라는 공연시간이다. 세계적으로 10시간을 넘는 연극 작품도 꽤 있지만 요즘 국내 연극은 2시간을 채 넘기지 않는다. 모든 것을 효율로, 속도로 계산하는 시대에 몸으로 대항하는 이 연극은 우리 관객에게도 느린 호흡으로 살 기회를 제공했다.


드디어 막이 오르고, “동지들이여, 시민들이여, 형제자매들이여!”이라는 스탈린의 연설과 함께 배경에 1940년대 전쟁기록영화를 투사하면서 시작된 연극은 1941~195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러시아 집단농장 콜호스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대기적으로 보여줬다. 러시아판 인생유전이라 할만하다. 나이가 차지 않아 참전 못한 청년 미하일과 남자들이 없는 마을을 책임지는 콜호즈 여위원장 안피사 등의 이야기가 이 펼쳐지는 제1부 ‘만남과 이별’, 전쟁이 끝나 남자들이 돌아오고 스탈린 독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제2부 ‘길과 갈림길’ 사이에 십 년의 세월이 있다.


연극은 많은 사람들의 운명의 교차를 다룬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역사의 소용돌이에서는 이 위로도 배신으로 변하고 마지막에는 불신과 분열의 분위기가 무대를 지배하게 된다. 농촌에 남은 사람들, 도시로 간 사람들의 삶은 달라지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영광의 인물과 위기의 인물도 끊임없이 생겨난다.


이것이 정해진 스토리대로, 쓰여진 텍스트대로 진행된다면 아마도 매우 지루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극은 주요 인물들의 에피소드에 집중돼 그 이야기들 사이에서 긴장과 이완을 체화한다. 보는 관객도 그 흐름에 따라 집중과 이완을 하게 된다. 이것을 도진은 하나의 교향악이라 표현했다. “드라마에는 그 자체에 멜로디가 있다”고 말하면서 그는 이 긴 시간 동안 관객이 편안히 연극을 볼 수 있는 것은 그 자체에 들어있는 음악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마리아 셰브초바는 이 연극의 스타일을 ‘산문의 연극’이라 칭했다. 배우들이 “소설을 온전히 공연하면서” 즉흥적 시도를 통해 “대본의 신체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소설의 강건한 내러티브는 배우들의 몸과 목소리를 통해 응축된다. 전체적으로는 비극적인 톤을 가진 이 작품을 우리가 힘들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은 한 사건이 끝나면 다른 사건을 맞기 위한 여유가 생기고, 비극적 사건들 사이에는 긴 희극적 릴리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아니한가.


여성과 남성 집단으로 나뉘어 질펀한 음담패설을 나누는 마을 주민들의 집단적 휴식, 씨뿌리기도 축제와 같이 함께 하는 농촌의 전통이 이 연극에 희극적 에너지를 부여한다면, 불행하게도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양이 적어진다. 집단농장의 삶이 곤고해지면서 사람들의 집단성은 분열되고 이기심이 싹트며 연극 첫 막에서 제시되던 카니발리즘적 에너지는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이다.


집단성의 해체, 혹은 코러스로 합류해 들어가는 개인에서, 개인으로 해체돼가는 코러스로 변화를 보여주면서 연극이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는 명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머니즘이 살아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단지 어떤 한 시기의 정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정치적 허구와 그 안에서 고통받는 인간 사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고발이다.


이 긴 공연의 모든 사건 속에 뗏목과 장대들이 있다. 10여 년의 삶의 다양한 무대들, 방과 집, 헛간, 목욕탕 등의 사적 공간과 파종과 축제의 무대가 되는 공적 공간들은 뗏목 모양으로 만들어져 무대 중앙에 매달린 단 하나의 나무판으로 만들어진다. 360도로 회전하고 아래위로 오르내리면서 모든 장면의 배경이 되어주는 이 뗏목은 나무로 만들어진 등장인물과도 같다. 무대를 감싸고 선 20개의 장대들은 숲인 듯 감옥인 듯 이곳을 탈출하지 못하는 이들의 삶을 에워싼다.


이 공연을 보고 아무도 이것이 새롭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이 공연은 ‘새로움’이 아니라 ‘낡음’을 강조한다. 목재로만 제작된 무대, 배우의 연기와 제스처만으로 연결되는 이야기들, 모든 관객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삶의 원초성에 대한 대사들. 그런데 왜 이 연극은 낡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가.


이 연극이 처음으로 서유럽에 소개될 때 서유럽 관객들도 연극에 놀랐다. 1988년 파리 가을축제에 초청된 이 공연을 보고 현 보비니 극장 예술감독인 파트릭 소미에는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건 우리가 연극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고 하는 것들의 종합이잖아. 코러스적 성격, 준 자연주의성, 서사적이고 교훈적인 인물. 이건 이젠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것들인데.” 그런데 도진과 말리극장의 연극들은 계속 서유럽에 초청됐고 인정받았다. 1992년에 초청된 ‘가우데아무스’(2001년 내한)와 1994년의 ‘폐소공포증’은 유럽의 새로운 연극 현상인 ‘코러스성’(등장인물들이 코러스가 되는 현상)의 문제를 무대로 회귀시킨 작품으로 인정되기도 했다.


2002년 유럽연극상을 수상한 도진은 인터뷰에서 그의 연극의 근원을 스승과 제자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우리사회가 진보의 행렬 속에서, 새로운 지식습득의 방법 속에서 상실한 것 중 하나로 그는 ‘전통적 가르침’을 들었다. 피와 살이 흐르는 선생이 인터넷과 컴퓨터로 대체되는 상황. 그는 선생은 제자들에게 사물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사람이며 제자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라 말하면서 유년기부터 자신의 삶을 만들어온 스승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첫 연극 스승은 두브로빈이다. 메이어홀드의 제자였으나 소련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연극을 만드는 것이 금지되자 전문적 활동을 포기하고 어린이들과 작업했던 그의 스승. 도진은 12살 때 수영강좌가 마감돼 연극을 하게 됐고, 그를 만났다. 도진이 말하는 두브로빈의 수업은 다음과 같다. 스승은 자기 주위에 아이들을 둘러앉게 하고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들은 아무거나 물었고 그는 마치 랍비와 같이 모든 것에 대해 설명했다. 도진의 회고에 따르면 그때부터 그에게 극장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하는 장소가 되었다 한다. 이 선생에게서 도진은 즉흥의 방법, 낡은 텍스트를 바꾸는 기적을 배웠다.


피터 브룩의 러시아 순회 공연과 조르지오 스트렐러 작품 ‘벚꽃동산’의 단 한 장의 사진에 자신의 상상력이 불타올랐다고 고백하는 도진은 실상 가장 중요한 훈련은 제자들과 수업이라고 단언했다. 제자들은 자신의 젊음을 이야기하여 선생을 늙지 않게 한다. 그리고 선생은 같은 것을 다른 세대에게 반복해서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워져야 한다.


이 이야기에 새로운 것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거기엔 다만 우리에게 잊혀진 것이 있다. 가르침과 배움에 관한, 인간과 연극의 진실에 관한 오랜 믿음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생존할 수 없다고 느끼는 이 시대에 그의 연극은 사람 사이의 교류에 대한 오랜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아리안느 므누슈킨이나 피터 브룩, 오태석 등 우리가 아는 연극의 대가들은 모두 이 믿음에서 연극을 시작한다.

노이정 /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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