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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파 인문학자들이시여, 좀스럽게 살지 말아요"
"강단파 인문학자들이시여, 좀스럽게 살지 말아요"
  • 정종진 청주대
  • 승인 2006.01.21 00:0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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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 세상이 '변소 급한 년 국거리 썰듯' 하네 그려

이 글은 지난해 청주대 논문집에 '인문학의 생기를 높이기 위한 성찰'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글을 요약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편집자주>

'부잣집 맏아들 평생소원이 아버지 빨리 죽는 것'이라 합니다. '사람은 죽을 때 이르러서야 돈과 지식이 소용없음을 안다'고 했습니다.

오랜 체험을 통해 마지막 호흡처럼 관 밖에 내놓고 간 조상들의 이말을 우리 대부분은 '새 뒤집혀 날아가는 소리'로 알아듣습니다. '돈에 눈이 멀면 삼강오륜도 석냥닷푼으로 보인다'는 말들은 유효기간 없이 각성을 촉구하는 말로 쓰일 수 있습니다.

'무식하고 돈 많은 놈과 미친년에게 칼 쥐어주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일이라고 하는데 지게작대기가 어느날 갑자기 골프채로 변해 '저 푸른 초원' 위에서 '미친년 널뛰듯' 하는 인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세상입니다.

왜 이렇게 돈 많은 사람들에게 원한이나 맺힌 듯 서두를 풀어가겠습니까. 인문학에 대한 말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은 확실히 돈과 관련이 덜한 학문입니다. '황금이 입을 열면 모든 입들이 조용해 진다'고, 돈이 되는 공부들이 '똥 싸놓고 우쭐대는' 데도 인문학은 주눅들어 조용하기만 합니다.

비분강개하여 인문학은 분연히 일어서야 하지요. 인문학은 자존심으로 삽니다. '한치의 벌레도 오푼 결기'가 있다는데, '바늘뼈에 두부살'도 아닌 우리들이 大義 아닌 小利에 목을 매어야 할까요.

카멜레온처럼 칠면조·공작새처럼 색을 바꾸고 깃털이나 세우는 게 변화일까요. 세간의 말마따나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되지 않습니다.' 오뉴월에 한철인 수박도 제값을 하지만, 봄에 달려 여름에 한껏 크고 가을에 맛을 흠씬 들여 겨울이 오는 입구에서 따낸 호박은, 맛은 맛대로 약효는 약효대로 탁월합니다. 그래서 진통을 겪은 산모의 몸을 잘 회복시켜 줍니다.

그럼 인문학을 호박으로 비유해도 괜찮을까요. 인문학은 벤처니 뭐니 하여 촐싹대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부자나 권세가를 '구정물통에 참외껍질' 정도로 알기 때문에 주눅들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것 처럼 공부해라, 그러나 내일 죽어도 좋을 것처럼 생활하라'는 말이 인문학도의 좌우명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변화란, '미친년 달래캐듯' 하는 게 아닙니다. 자존심을 강하게 가지고 '일신 일일신 우일신'해야 합니다.

2.

인문학은 문사철이 기본입니다. 문학은 상상력을, 사학은 객관적 사실을, 철학은 보편적 진리를 최상의 덕목으로 하여 제 길을 잡아가지만 그것이 크게 다른 길이 아니지요.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지금까지 문사철은 同根異枝로 여겨왔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그대로 인문학의 역사입니다. 학교까지 돈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요즘 인간존중이란 말이 가당찮고 시대착오적이라 여기는 사람들을 향해 촌철살인의 말로 자극하고 설득해야 합니다. '똥마려운 년 국거리 썰듯', '수박밭에 노는 아이에게 꼬챙이 쥐어준 듯' 불안한 현실을 위해 '江湖派' 인문주의자들은 힘써야 합니다.

'강단파' 인문주의자 여러분들은 아셔야 합니다. 진정 아름다움(美)이 되려면 힘을 갖춰야 하고, 착함(善)이 사악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힘은 무엇이겠습니까. 좀스럽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포용력을 더 키우기 위해 대학에 머물고 있습니다. '大學之道 在明明德'이란 '대학'의 서문 첫구절이 여러분의 화두가 되어야 합니다.

강단은 여러분을 관념주의자들로 만들기 쉽습니다. 머리와 입은 '참기름 바른 듯' 잘도 돌아가는 데 손과 발이 제자리에서 버둥거리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횃대 밑에서 호랑이 잡는' 사람일 뿐입니다.

3.

인문주의자들은 각각 중심인물이 됩니다. 정치나 경제 등에서도 최고의 권력자란 말을 쓰지만, 인문주의자는 여기 주눅들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허약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기울이면 삼거웃이 드러난다'고 했듯 말입니다.

어떤 소설가는 재기발랄한 말을 하지요. 모든 위대한 종교가 부르짖는 것을 요약하면 '헛되도다 헛되도다'하는 것일 뿐이라고요. 헛된 인생이지만 이 진실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생기있게 사는 것이 지혜고, 그런 지혜를 주는 사람을 중심인물이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엔 중심인물이 많습니다. 법정 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은 어떻습니까. 김지하의 스승인 장일순 정도면 예사롭지 않지요. 조정래, 송기숙, 김지하, 박경리, 김용택, 신경림, 황석영 등 꼽아보면 적지 않지요. 문학 쪽이 강하다고요? 그러면 한옥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신영훈이라도 좋고, 새로운 생명관을 제시하는 젊은 학자 최재천도 그렇고, 우리 국토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심미안을 만들어준 유홍준은 어떻습니까. 여기서 자제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자존심을 발바닥으로 내려보내고 살고 있는지요. 우리 대부분이 우리의 삶을 살지 않고 남에 의해 떠밀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깐에는 산다고 '용수가 채반이 되도록' 우기고 있지만 제 생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하는데 도무지 제대로 될 수 없지요.

강단파 인문주의자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인간존엄을 지키기 위해 속물근성에 빠지지 않으려는 용기 말입니다. 강호파 인문주의자들이 이 점에서는 한 수 위입니다. 그들은 결단했고 용기있게 지행합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강단파 인문주의자들이 어떻게 자기단련을 해야 할까요.

4.

감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해야 되겠습니다. 교육이 잘 길들이는 대로 몸을 맡겼기 때문에 '눈먼 나귀 방울소리 듣고 따라가듯'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야성'을 '자연 또는 본능 그대로의 거친 성질'이라 해설하고 있군요. 하긴 야성을 잃은 학자님네가 엮은 건데 별 수 있겠습니까. 요즘 청소년들이야 단추 두어개 따 놓으면 야성이고, 머리털을 메두사처럼 볶다가 삶다가 잡아챈 것처럼 하고 다니면 야성적이라고 하더군요. 한마디로 드센 척 하는 사람을 야성적이라고 하고들 있지요. 그러나 야성이란 말을 국어사전 식으로 부정적으로 보면 안됩니다. '자연에 적응하기 위해 형성된 품성'이기 때문에 야성은 가장 자연적인 것이지요.

옛날 중국 사람이 한국 사람더러 '저들은 일생의 반을 호랑이에 물려가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소비하고, 나머지 반은 호환을 당한 사람 집에 조문을 가는 데 쓴다'라고 했는데, 이 속담을 변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사람들 반평생은 영어 배우는 데 쓰고, 반은 컴퓨터와 대면하는 데 쓴다'고 말입니다.

강단파 여러분들은 지금부터라도 자기 자신을 고쳐서 살도록 해야 합니다. '사주팔자는 독 속에 들어가 있어도 못피한다'고 하지만 팔자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강단파들은 책을 지침으로 삼기 일쑤이니 책으로 말해 볼까요.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 '빠빠라기' '작은 나무야 작은 나무야', '제로니모'를 읽게 되면 야상에 대한 이해와 함께 여러분의 감각이 다소간 생기가 돌 것입니다. 그외에도 많지만 생략하겠습니다.

人文은 天文과 地理 사이에서 제 소명을 깨닫는 영역입니다. 하늘의 문자와 땅의 이치를 통해 인간됨의 분수를 지키는 것이 인문입니다. 천문과 지리를 보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살 수 없습니다. 자신의 온 감각을 다 열어놓고 총체적으로 복 깨우쳐야 합니다. 사람의 관상도 보고 하늘과 땅의 기와 관상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을 관찰하고 사색해야 합니다. 인문학은 결코 벤처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5.

순도 높은 인문주의자가 되어 공작새처럼 날거미만 먹고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돈을 좇지 말고 돈이 따라오도록 하자'는 말입니다. 인문학자들까지 내놓고 돈돈 하는 것 보면 참으로 안쓰러워 보이지요. 인문학 시장이 좁다고요? 천만의 말씀이죠. 장안에서 낙양의 지가를 올려놓는 것은 대부분 인문주의자들입니다. 우리도 기왕에 제대로 해보자 이겁니다. 노루 꼬리만큼 공부하고 용꼬리 만큼 팔아먹으려 하지 말고요.

인문학이 모든 것의 위에 있다고 말하기는 쑥스럽군요. 한번 겸손을 떨어본다면 가장 밑바닥에 있어야 한다고 할까요. 인문학이 경제부흥의 바닥을 잘 깔아주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뜨거운 국에 맛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인문주의자의 길을 잘 택해놓고 후회하고 딴전을 피우는 학도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긍심을 가지십시오.

언어를 배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언어를 통해 문학으로 깊어져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간이 만든 언어, 사상에만 연연하면 상투적인 논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어떤 분야든지 보십시오. 그 분야에서 중심인물들이 되고 있는 사람은 잘 길들여진 사람이 아닙니다. 하다못해 논두렁 정기라도 받은 사람이 개성적인 인물이 됩니다.

▲헬렌 캘러 ©
틈만 있으면 자연으로 눈을 돌리십시오. 책만 들여다보고 배운 사람들 끼리끼리만 통하는 곳에서 빠져나와 산촌, 어촌의 언어를 얻고, 그들의 생활을 함께 겪기도 해야 합니다. 하찮다고 여겼던 사물이나 어떤 정황 또는 현상을 끈질기게 관찰하고 새롭게 느껴보십시오. 헬렌 캘러가 '3일만 보았으면 하고 간절히 소망했던 그 마음 상태를 여러분 마음 속에 옮겨 두십시오. 그러면 하루하루 쫄깃쫄깃한 맛으로 보낼 수 있게 됩니다.

유명 작가들의 위대한 작품을 빼놓지 않고 읽는다고 덤벼드십시오. 낮에는 틈나는 대로 들로 산으로 자연과 대화하고 자연의 정기를 받고, 밤을 지새우며 위대한 작가들과 영혼을 통해 보십시오.

아무리 인간이 '제 잘난 맛에 산다'지만 별 대수롭지도 않으면서 자꾸 뭔가 젠 체 하려는 사람들 보면 안쓰럽지 않습니까. 인생 별 것 아닙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면, 별 것 아니기에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사는 사람은 정말 스스로의 영혼을 위대하게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이란 비누와 같아 다 닳도록 쓰면 영혼이 깨끗해진다'는 시구를 잘 되새겨 봅시다. '개똥밭에서 이슬 마시며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데, 우리 모두 열심히 살고 한참 후에 죽어서, 그 때 함께 편히 쉬도록 합시다.

 

필자는 청주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 '힘의 문학으로 가는 길'(태학사 1993), '한국 현대문학의 성 표현 방법'(태학사 199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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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2006-02-16 12:11:16
좋은글 잘읽었습니다..저도 같은생각으로 문학을 택햇지만..
대학내내 문학의 정체성? 여튼 문학이 취업을 위한 학문으로인해 설자리를 잃는거에 참담했습니다..ㅠㅠ
교양으로서..문학의 설자리가 필요하죠,.,.

less31 2006-01-28 09:38:04
인문학을 하는 모두가 "인간존엄을 지키기 위해 속물근성에 빠지지 않으려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가? 그런게 대체 가능하기나 한가? "인문학자들까지 내놓고 돈돈 하는 것 보면 참으로 안쓰러워 보"인다는 필자는, 자신이 재직하는 학교의 인문학 관련 시간강사들을 볼때마다 참으로 안쓰러울지도 모르겠다.

맥락을 떠난 채로 무조건 속물주의에서 벗어나라는 '인문학'적인 도덕을 들을 때면, 왜 인문학이 몰락하는지 답은 바로 거기 써있는 거 아닌가. 이런 상투적 얘기는 또 얼마나 진부한가.

신상기 2006-01-22 23:31:31
이 글이 교수의 글인지 알수가 없고 이것도 신문에 실어서 이렇게 전달하려는 언론매체도 우습군요.

fiesole 2006-01-22 18:57:40
느낀 바가 많습니다. 글도 재미있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