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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나'와 '남' 사이의 학문
학이사: '나'와 '남' 사이의 학문
  • 강돈구 한중연
  • 승인 2006.01.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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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13년의 시간 강사 생활 끝에 신임교수 발령장을 받는 자리에서 대학총장에 국무총리까지 거쳤던 원장(원로교수)께서 몇 가지 충고를 하셨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앞으로는 잡문을 절대로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내가 대학신문이나 일간지에 쓴 글이 많아야 서, 너 개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마도 학문에만 전념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송년회가 끝나고 밤늦게 택시로 집에 가는 길에 교수신문 기자로부터 글 청탁을 받았다.  ‘學而思’에 쓰는 글은 잡문이 아니라는 기자의 말, 그리고 술이 죄라던가 그 때 거절을 하지 못하고 새해 벽두 아침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종교학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접점에 서 있다.  어느 분은 종교학이 보다 인문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느 분은 종교학이 보다 사회과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접점에 서 있는 학문일수록 사고를 칠 발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가 하면 제도권 내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다.

약간 괴롭기는 하지만 종교학의 인문학적 성격과 사회과학적 성격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문학은 ‘나’의 문제에서 출발하고, 사회과학은 ‘남’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접점에 서 있는 종교학은 따라서 “나는 어찌할까?”에서 출발하기도 하는가 하면, “그들은 왜 그 모양인가?”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의 문제에서 출발하면 철학이나 신학, 교학과의 차별성을 획득하기가 쉽지 않고, 또한 어느 면에서는 ‘학문성’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종교학이 학계나 사회를 향해 보다 많은 발언을 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성격보다는 ‘남’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사회과학적 성격을 의도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이 때 예상하지 못한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나’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해결하고 싶은 욕구를 보다 많이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주로 종교학을 전공으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남’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시간낭비이다.  불교에 관심이 있는 학생은 기독교인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학생은 무속의 문제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낭비이다.  그들을 통해서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은 안타깝지만 그들에게 조급증만을 유발할 뿐이다. 

나와 남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좋은 말이 ‘우리’이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접점에 서 있는 종교학은 이제 나와 남의 문제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아니 오히려 ‘우리’의 문제에서 처음부터 출발하는 것도 좋을 듯도 하다.  새해에는 종교학자가 살필 수 있는 ‘우리’의 문제에 보다 많이 천착하고 나아가서 그런 문제들을 보다 많이 찾아내야 할 것 같다.

이 글이 교수신문에 게재되는 글이니만큼  ‘우리’의 문제 한 가지만 언급하고 나가야겠다.  지금까지 종립학교에 취직하려는 교수는 그 학교를 설립한 종교의 신자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해 왔다.  당연할 수 있다.  또는 사소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결코 사소하거나 사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현 교육제도 안에서 이 문제는 종립학교의 종교교육과 함께 종교학계가 나서서 대응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새해 벽두 이 글을 쓰면서 올해에는 종교의 자유 못지않게 종교의 평등이라는 또 다른 ‘우리’의 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볼까 한다.

강돈구 / 한국학중앙연구원·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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