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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중심 문명은 종말했다...'여성 선택' 출간 화제
남성 중심 문명은 종말했다...'여성 선택' 출간 화제
  • 김재호
  • 승인 2022.02.22 1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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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여성 선택』 마이케 슈토베로크 지음 | 이미옥 옮김 | 에코리브르 | 374쪽

정착 생활과 남성 문명의 탄생

인류는 대략 1만 년 전부터 경작과 축산을 발명한 덕분에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이어서 생겨난 문명은 오로지 남자의 욕구에 따라 남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남자는 수백만 년 전부터 통용된 생물학적 원칙을 억압하고 통제했다. 요컨대 어떤 남자와 섹스할지를 여자가 결정하던 여성 선택 원칙을 억압하고 통제한 것이다. 이와 같은 억압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국가와 정치 시스템 그리고 문화가 탄생했다.

 

이런 진화생물학적 성별 차이에 대한 얘기는 지뢰밭처럼 위험하다. 논쟁을 할 때 생물학적 사실은 가치 중립적 사실로서 언급되지 않고, 대부분 백인이나 남성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무시당하기 일쑤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생물학적 표준에 대한 언급을 반대하는 태도가 남아 있다. 따라서 먼저 진화생물학적 사실과 남자가 만든 문명을 통해 악용된 사실을 분리해야 한다. 인간이라는 종의 특징을 가치 중립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수학이다. 측정 가능한 많은 표준은 안정적인 분포, 이른바 정상 분포를 보인다. 이런 분포에 따르면, 대부분의 개인은 이런 표준의 평균적 영역에 속한다. 여기에서 평균보다 위거나 아래에 속한 소수도 정상이다. 표준에 대한 언급은 집단에 대한 언급이기도 한데, 이때 집단에 속해 있는 각 개인은 표준이 지니고 있는 모든 특징과 일치하지 않아도 된다.

 

남자 또는 여자라는 유형에 속하는 ‘사람’에 대한 얘기

이 책에서는 무엇보다 ‘남자’ 또는 ‘여자’라는 유형에 속하는 사람을 다룬다. 즉, 성별을 이중적 특성으로 보지는 않지만, 신체적으로 상이한 두 성별 사이의 성적인 번식은 후손을 만들기 위해 작동한다. 이것이 여성 선택의 진화론적 출발점이다. 이 책은 서구와 일부 근동 문화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이들의 문화적 기원을 관찰한다. 이들 문화는 이론적으로 남동부 지중해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중점을 유라시아 또는 유럽에 두지만, 정착 문명이 전 세계를 관통한 기본 원칙이었음은 금방 알 수 있다.

 

『여성 선택』의 저자인 마이케 슈토베로크. 사진=www.fraumeike.de

이 책은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말들로 가득하다. 성별이 무엇이든 정치적 진영이 어떻든 상관없이 그렇다는 말이다. 독자가 어떤 위치를 더 선호하는지에 따라 저자에게서 페미나치(feminazi: feminism과 nazi의 합성어로, 극단적이며 전투적인 여성우월주의자를 일컫는다)를 볼 수도 있고, 자기 집안을 헐뜯는 반(反)페미니스트를 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예전에 모욕감을 느끼고 억압당하는 느낌을 받은던 문장을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진심으로 자신을 믿고 인내심을 갖고 책을 계속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저자는 여자의 친구가 아니라 사람의 친구로서 얘기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여성 선택이라는 짝짓기 시스템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수컷은 짝짓기를 위해 모종의 성과를 보여줘야 하고 암컷은 선택을 한다. 암컷이 늘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은 아니어서 금방 알아차리긴 힘들지만, 어쨌든 짝짓기 행위는 순전히 암컷의 요구에 달려 있다. 이때 수컷은 늘 경쟁을 해야 한다. 찰스 다윈은 이를 ‘성 선택(sexual selection)’이라고 했다.

여성 선택이라는 근본 원칙으로 인해 암컷과 수컷은 전혀 다른 재생산 전략을 만들어내야 했다. 후손을 생산하기 위해 교미를 할 필요성은 있지만, 그렇다고 수컷과 암컷이 같은 목표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의 목표를 추구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즉, 수컷은 가능한 많은 암컷과 짝짓기하려 하고, 반대로 암컷은 가장 멋진 수컷하고만 짝짓기를 한다. 따라서 수컷은 많은 암컷을 획득해야 하고, 암컷은 많은 수컷을 거부해야 한다. 이 때문에 성별 사이에 끊이지 않는 갈등이 생기고 성생활의 균형이 깨진다. 이를 일컬어 ‘성적 갈등(sexual conflict)’이라고 한다. 여성 선택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수컷 가운데 대다수는 짝지을 암컷이 전혀 없거나 매우 드물게 암컷과 짝을 짓는다는 점이다.

진화가 수컷과 암컷에게 사악한 짓을 허락한 것 같지만, 이것이야말로 전체 동물 세계에서 가장 폭넓게 퍼져 있는 성공적인 번식 모델이다. 이와 동시에 암컷의 성 선택은 진화상 적응을 위한 도구이자 기원이기도 하다. 개인과 종(種)의 성공을 결정하는 일종의 조절 나사인 것이다.

문명은 남자가 남자를 위해서 만든 것이다

남자가 문명 시대를 열기 위해 정착 생활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밟아야 하는 중요한 단계 중 하나는 여성 선택이라는 원칙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농업과 이로 인한 재산의 축적은 남자에게 섹스라는 자원을 거의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다. 남자는 여자의 재산 소유권을 거부하고, 집이라는 좁은 세계에서 육아에 전념하게 함으로써 공공 영역에 진출할 기회도 차단했다. 결혼이라는 제도 때문에 여자는 마침내 거의 100퍼센트 남자에게 종속되는 상황에 몰렸다. 확실한 피임약의 부족으로 여자는 임신을 막을 수 없었고, 이것이 오히려 남자에게 환영받았다. 어떻게 그리고 누구와 자손을 만들 것인가 하는 결정은 이제 여자가 아니라 남자에게 달렸다. 그리하여 남자는 외부 세상의 구조, 그러니까 오늘날까지 사회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무역·경제·정치·노동을 여자의 욕구를 고려하지 않은 채 구축할 수 있었다. 요컨대 문명은 남자가 남자를 위해서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해, 문명은 남성 중심적이다.

피임, 남성 중심 문명의 균열

진화생물학적으로, 여자가 피임약을 통해 경제적 독립을 이룩하고 임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이때부터 여자는 남성 위주의 시스템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은 일방적인 문명으로 인해 억눌렸던 사람들의 청산작업이다. 이는 남자에게 매우 고통스러울 수 있다. 남자는 수천 년 넘게 구축해온 것, 옳다고 천명해온 것이 눈앞에서 뜯겨나가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 나아가 자기 존재에 필요한 자원인 섹스에 대한 통제권마저 사라진 것처럼 느낀다. 거의 합의를 볼 수 없는 욕구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천성 혹인 양육

성별과 관련한 논쟁이 있을 때면 이른바 남성주의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여자는 재능이 부족하다는 불분명한 근거를 제시하곤 한다. 이들 남성주의자들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오늘날 볼 수 있는 권력관계는 진화의 결과라고, 그러니까 자연의 질서라고 끊임없이 주장한다. 발전되고 공정한 사회에서 생명과학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생명과학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는지에 대해 답해줄 만큼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그 배후에는 수백 년이나 지속된 논쟁, 즉 오늘날의 인류를 만든 것은 진화인가 문화인가라는 질문이 있다. 바꿔 말해, 인간의 독특함은 생물학적 소질인 천성(nature)인가, 그렇지 않으면 사회문화적 양육(nurture) 때문인가라는 논쟁이다.

천성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쪽에는 생물학자와 결정론자들이 있다. 이들은 인간 사회의 모든 구조는 타고난 소질의 결과라고 믿는다. 이러한 타고난 소질이 앞으로의 삶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육체적 특징을 기반으로 사회적 위치를 합리화하곤 한다. 즉, 계층 가운데 아래쪽에 있는 자는 열등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여긴다. 이와 반대로 상위에 있을 수 있는 주인공은 최종적인 알파 동물이다. 즉, 힘세고 승리에 대한 의지가 막강해서 인간으로까지 진화할 수 있었던 슈퍼 DNA를 가진 동물이다.

양육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쪽에는 문화주의자와 사회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인간의 태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일한 요소로 문화와 사회를 꼽는다. 문화주의자가 보기에 인간은 마치 완벽한 형태로 덤불에서 튀어나온 듯하다. 창조주의와 마찬가지로 문화주의 역시 인간을 진화라는 문맥 속에 넣는 걸 거부한다. 정착 생활을 하면서 문명을 건설한 인간은 그러한 문화가 존재하지 않던 진창과도 같은 시대로부터 의연히 일어나 자신의 존재를 창조하고 힘을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유 의지가 곧 인간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인간은 그 자체로 전능한 신이다.

이처럼 두 극단 사이에서 사회는 논쟁을 펼치게 된다. 문화주의자는 생물학적 사실들을 부정하며, 생물학자는 마치 모든 불공평은 자연에 의해 미리 결정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논쟁에서 절대적인 답은 없다.

 

신체적 과정을 문화 안으로 도입

신체 상태는 우리 행동에 테두리를 만든다. 테두리 내에서는 상당히 넓은 행동의 여지를 갖지만 우리는 오로지 근육이 할 수 있는 만큼만 움직이고, 감각세포가 인지하는 것만 인지하고, 뇌세포가 작업하는 것만 이해하며, 신경 전달 물질로 이루어진 운동의 혼합이 발산하는 것만큼만 느낀다. 우리는 더 이상 신체와 정신이 일체가 아닌 것처럼 행동할 수 없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와 무관한 것처럼 행동할 수 없다.

신체적 과정을 문화 안으로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캐나다 출신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이다. 그는 우리 문명이 진화생물학적 표준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피터슨은 이론(異論)이 분분한 학자다. 즉, 어떤 사람들은 그를 20세기, 심지어 21세기의 가장 현명한 사상가 중 한 명으로 간주하는가 하면, 그에게서 파시스트적 여성 혐오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와 같이 극단적인 반응은 그가 내세우는 전제를 중립적으로 받아들이는 걸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서술과 평가를 분리해야 하고, 생물물리학적 사실과 이에 대한 해석을 분리해야 한다. 가치 중립적 사실만이 가능성을 열어놓으며, 평가를 내리게 되면 이런 가능성에 한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조던 피터슨의 결론에 거의 동의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가 논쟁할 때 근거로 삼는 생물학적 표준은 적절하다고 간주한다. 사물은 흑백 논리가 아니고, 선악이 아니며, 옳고 그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피터슨이 사회적 논쟁에 미친 영향력을 근거로, 저자는 이 영역을 자기 목적을 위해 도구화하는 자들에게 맡겨두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제 인간의 생물학과 이 생물학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력을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살펴봐야 할 시간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문명의 건설

저자는 순수한 형태의 여성 선택으로 회귀하는 것을 변호하지 않는다. 진보, 평화로운 공존, 섹스를 위해 벌이는 심각한 경쟁은 상대를 배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성의 성생활을 억압함으로써 최초로 우리의 문명이 등장했다. 그러므로 여성에 대한 억압을 보상할 수 있는 안정망 없이 폐기한다면, 문명화로 얻은 모든 업적을 폐기해버릴 위험이 있다. 따라서 새로운 문명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가 되었다. 남자의 욕구와 여자의 욕구를 동일하게 고려하는 문명이 바로 새로운 문명이다. ‘남성 중심’의 문명은 남성적 생식 전략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해 공격성과 경쟁이라는 전략의 결과로 어떤 문제를 불러일으켰는지 밝혀내고, 그 배경을 탐구하고, 충격을 완화시켜야 한다. 또한 우리가 지금까지 성생활과 연관 짓지 않았던 문제, 예를 들어 관료주의와 화폐 경제의 배경도 탐구해야 한다. 사람들 사이의 신체적 차이를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가능성을 열어주는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말이다.

이것은 공통적인 표준과 욕구에 대해 이해하고, 이러한 욕구를 완전히 새롭게 충족시키고, 무엇보다 서로 협상할 때라야 가능하다.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분열을 극복할 때라야 가능하다. 이렇게 하려면, 여성 선택이라는 원칙이 남성 문명을 만들 때 어떤 근본적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폭넓고도 이데올로기적 개입이 적은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인간적인 공생을 새롭게 협의하고자 할 때, 오늘날 얼마만큼 성생활이 문제 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냉철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으로 일종의 빠진 고리(missing link)를 제공하고자 하며, 이런 고리를 통해 유전적 구조와 문화적 특색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

힘들어도 가야 할 길

저자가 남성 문명을 이토록 극단적으로 분석한 이유는, 사람들은 불공평을 전제 조건으로 삼는 시스템을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의 운동은 수백 년 전부터 시도되어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그 운동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남녀를 공평하게 대우할 계획도 없고 오히려 명백하게 배제시키는 구조 때문이다. 남자는 수천 년 넘게 위계질서와 불공평이 내재하는 관료들로 이루어진 권력망을 구축해두었다. 모든 공직자는 자신의 지위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행동할 수 있을 뿐이며, 개인의 권력 관계를 바꿀 가능성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오늘날 작동하는, 수익 창출을 위해 노동력이 반드시 필요한 경제는 가능한 적은 돈으로 매일 동일한 성과를 내야 한다. 그러나 보존하고 유지하는 노동과 생산적인 노동이 동등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며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지위를 통해 보상할 때에야 비로소 여자가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사회 건설에 진정으로 참여할 수 있다. 돈이 의미를 부여하는 삶의 수단이라는 편견을 벗어나야 비로소 돌봄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집 안이라는 내면의 세계에서 여자를 밖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사생활과 공공의 생활 사이에 있는 경계, 사회 계층 사이의 경계, 국가 사이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국가, 계층, 성별을 지구라는 폐쇄적인 생태계에서 모두가 모두의 행동에 의해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방식의 일부라고 파악해야 한다. 성생활, 노동력의 착취와 억압은 남자가 우리 사회를 만들 때 동반된 현상이 아니라 그 기초다. 그래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면, 우리는 여성 할당제와 개발도상국 원조보다 훨씬 더 심도 있고 크게 생각해야 한다.

 

남과 여, 성 선택은 과연 누가 주도하는 것일까. 사진=픽사베이

이 책에서 언급한 그 어떤 것도 몇 년 안에 이 세상을 개조할 수는 없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보이든 비현실적으로 보이든 상관없다. 많은 부정적이고 불공평한 발전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런 발전이 점진적으로 유지될지 아니면 갑작스럽게 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올지 모른다. 저자는 실제로 점차 향상되기보다 붕괴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그럼에도 인류는 문명을 건설적으로 만들 기회가 아직 있다고 믿는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 미투,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 같은 운동의 극단적 접근법은 오늘날에도 이미 많은 사람이 우리 문명에는 기본적으로 바뀌어야 할 게 있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니 성적 본능에 의해 발생한 세상의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화해이며, 보편적인 해답을 찾고자 하는 무한한 노력이다. 독일 철학자 미하엘 슈미트살로몬(Michael Schmidt-Salomon)은 수년 전부터 ‘지식의 통합’을 요구해왔다. 이러한 요구는 바로 진화생물학적 사실을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실들을 고려해 윤리적인 삶의 기본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한다.

정비 모드를 전혀 갖추지 않은 지금의 시스템에서 이와 같은 과제는 무한하게 어려울 것이다. 세계 질서의 근본적 변화는 수많은 세대를 거쳐 지속될 테고, 많은 희생이 따를 것이다. 남성 문명의 방어도 끔찍한 수준이 될 것이며, 따라서 인셀 폭력은 아마도 더 증가하고 사람들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필요한 변화를 위해 마음을 열어야 한다. 특히 남성 문명의 승자들에 의해 짓밟혀온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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