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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_미술평론가들이 말하는 우리시대 미술비평
기획취재_미술평론가들이 말하는 우리시대 미술비평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5.10.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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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미·이정우, ‘현장성’과 ‘이론적 깊이’ 돋보여

▲ © 이재열

국내에서 ‘미술비평’은 보통 아카데미 내의 미학자, 미술사학자와 제도를 통해 등단한 미술평론가, 그리고 전시기획자 등이 담당한다. 이처럼 다양한 부류를 묶어 ‘미술평론가’라 칭하다보니, 각자 ‘전문성’을 갖춘 분야가 달라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평단으로부터 흔히 들려오는 말은 “A 평론가 그림 볼 줄 몰라”, “B 평론가는 이론이나 역사만 알지 작품분석 능력이 없어”, “C 평론가는 비평적 안목이 없어” 하는 이야기들이다. 이는 기존에 비평가들을 향해 던져졌던 ‘주례사 비평’이나 ‘인상비평’ 문제가 아닌, 비평가들끼리 서로의 전문성을 ‘불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요즘 미술월간지 리뷰 면을 보면 젊은 세대들의 약진이 두드러진 가운데, 몇몇 비평가들의 글쓰기가 주목받고 있다. 1세대 비평가들과는 달리 이론적인 면도 갖춰지고 새로운 글쓰기 방식도 시도돼 기대를 모으고 있다. 물론 이전 세대처럼 ‘그룹’을 형성해 비평적 흐름을 주도해나가고 있진 못하지만 말이다. 그런 가운데 교수신문에서는 11명의 평론가들로부터 ‘요즘 어떤 평론가의 평들을 주목해서 보고 있는지’, 상호인식과 평가에 대해 들어봤다.

젊은 평론가들의 눈에 띄는 약진 

우선 비평가들의 시선이 가장 많이 쏠리는 곳은 강수미, 이정우, 반이정 씨의 글들이다. 그중에서도 강수미의 비평은 단연 주목을 받고 있다. 김종길, 하계훈, 이선영, 조선령 씨 등은 강수미의 비평에서 ‘차별성’을 발견한다. “현장성과 이론적 깊이가 동시에 갖춰졌다”, “자기 생각이 잘 정리돼 있으며, 메시지가 뚜렷하다”, “짧은 글이지만 ‘연구’해서 쓴 글임을 알 수 있다” 등이 강 씨의 비평을 향한 평론가들의 평이다. 이전 세대들에게 결핍됐던 이론적 ‘전문성’이 신뢰를 샀고, 개개인의 작품들을 흩어지게 하는 것이 아닌 동시대적 맥락에서 위치 지우려는 그의 ‘비평적 태도’들이 남다른 안목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술비평이란 1단계로 작품을 해체하고 뜯어보며, 2단계로 풀어낸 것을 재해석 하는 것인데, 강 씨의 평론들은 자기의 목소리는 있지만 전면적으로 내세우지 않으며, 동시에 개별적 작품들의 섬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잘 이해한다는 평가다. 물론 그의 비평이 쉽게 읽히진 않는다는 면에서 “일반인들에겐 가독성이 떨어진다”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면을 오히려 신뢰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음미할만한 지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최열, 류병학 씨도 강수미의 비평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일견 주목한다. 최 씨는 “작품 해석이나 평가에서 그의 해석에 전적으로 수긍하진 않지만 문제의식의 날카로움과 진지함 때문에 그의 글쓰기를 지켜본다”라고 말한다. 류병학 씨 역시 강수미의 글에 전폭적 지지를 보내지 않는 이유는 “어떤 것은 반짝 빛나지만, 또 다른 것은 탄탄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류 씨는 “젊은 비평가들의 문제는 유행을 타고 감각은 있지만 아직까진 소화해내는 능력이 부족해, 어떤 글들을 읽으면 허탈하다”라고 털어놓는다. 그런 비판은 궁극적으로 보자면 평론가들의 일관된 ‘철학’의 부족함이나 ‘자신만의 문맥의 결여’를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술·디자인 평론가로 불리우는 이정우 씨 글들 역시 비평가들의 신뢰를 얻는다. 유진상 계원조형예술대 교수는 “무엇보다 많이 다니고 많이 보는 비평가로서 꼼꼼한 관찰과 전체를 보는 안목이 있다”라고 평한다. 즉 ‘보는 눈’과 ‘현장성’이 모두 갖춰졌다는 것. 유 교수가 비평을 보는 기준은 세 가지다. ‘자기관점’, ‘미술에 대한 안목’, ‘인문학적 글쓰기’가 그것. 그런 점에서 이정우의 비평들은, ‘권력에 기운 솔직하지 않은 글’, ‘전체에 대한 관점을 드러내지 못한 글’, ‘평균적인 입장에 올라탄 글’ 등과는 구별된다는 의견이다. 강수미 씨 역시 “언어가 비평적이냐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자기의 의지를 발현하는 비평가’로 이정우의 비평을 구분 짓는다.

반이정 씨 또한 젊은 비평가로 ‘읽히는’ 비평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론가들의 견해는 상반된다. 반이정의 비평들은 흔히 ‘요즘 시류에 맞는 글쓰기’로 분류되곤 한다. 즉 발랄하고 쉬워졌으며 일상적인 차원에서 작품을 이야기하듯 풀어나간다. 강수미, 이선영 씨 등은 그런 그의 비평에는 ‘신선함’과 ‘경쾌함’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며 “쉽게 잘 읽히는 비평”이라 말한다. 하지만 반대로 “무게를 찾기 어려워” 그의 글쓰기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자칫 비평가의 철학이나 문제의식의 진지함이 결여될 수 있음을 우려하는 듯하다.   

강단 평론가들, 작품분석 不在 

중견급으로 올라가서는 이태호 경희대 교수의 글이 본받을 비평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김준기 씨가 “아방가르드, 개념미술, 공공미술 등 미술계 내부를 지향하는 비평이 아닌, 미술과 미술바깥의 소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단연 이태호의 글이 가치있다”라는 평을 내린다.

고충환 씨와 이선영 씨의 글들은 ‘현장비평가’의 글로서 주목받는다. 하지만 고충환의 글들은 “개개의 작품들을 읽을 뿐, 동시대적 맥락을 담아낸 점이 부족하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즉 미적 보편성의 관점에서 개별 작품들의 감상안을 잘 보여주지만, ‘동시대적’ 예술과제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그러한 비평의 ‘생산성’에 대해 의문부호를 다는 평론가들도 있다. 이런 평론은 해당 작가에겐 좋은 평론일진 모르나, 평론가나 독자들에겐 “왜 이 작가를 비평하고 주목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해주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이선영 씨에 대해선 “과거에 좀더 이론에 치우쳤다가 최근에는 많이 쉬워졌다”는 평가가 있다. 오랜 현장경험이 이런 변화를 끌어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또 원로비평가로서 여전히 비평의 모범이 될 이들로 원동석, 박용숙 교수의 평론들이 거론됐는데, 아직은 이들을 넘어설 중진과 신진이 부재하다는 게 일부 평단의 목소리다. 

강단비평가라 할 수 있는 미술사학자들의 비평에 대해선 많은 평론가들이 ‘비평’이라 부르기에 부적절한 면이 있음을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미술월간지에서 정영목 서울대 교수, 김정희 서울대 교수, 홍선표 이화여대 교수 등의 글을 접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들이 문헌학적 맥락만 이야기할 뿐, 새로운 작품분석은 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미술사학자들의 글쓰기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잡지 편집자들이 이들 글을 메인 전시에 대한 비평이나 리뷰로 내보낸다는 게 문제일 수 있다. 즉 미술사학자들은 미술사적인 의미에서 전시회에 나온 작품들을 논하지만, 독자들은 이를 ‘비평’이나 ‘리뷰’로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이다. 

미학자로서 너무 어려운 글쓰기는 평론가들에게조차 읽히지 않고 있다. 대표적으로 김복영 홍익대 교수의 글들을 두고, 몇몇 평론가들은 “상징적 기호들로 가득 차 해독 불가능하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미학적 테두리에 갇힌 글쓰기라는 게 문제인데, 비평이 ‘읽히기 위해’ 존재한다면, 이런 비평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졌다고 할 수밖에 없다.   

‘취향’ 아닌 ‘논리’의 비평

평론가들 중 상당수는 사실 “읽을 만한 비평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심상용 동덕여대 교수는 “현 미술계의 시류에 대한 논쟁과 해석학적인 틀에 대한 의사소통 없이 단편적인 글로만 만나다보니 비평가들의 상호인식은 어려운 상황이다”라고 털어놓는다.

이정우 씨 역시 “간헐적으로 몇몇 개별적인 논쟁들의 유의미한 문제제기를 하나, 그 외엔 크게 눈에 띄는 평론을 본적이 없다”라고 일축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아니다. 가장 심각한 건 일부 평론가들이 여전히 기성 평단의 ‘자기 보신주의’에 편입해 평론가로서 다른 평론가를 評하기를 일체 꺼린다는 점이다. 이들의 문제는 단지 ‘발언’을 피한다는 데 있지 않다. 한 평론가는 “비평은 ‘취향’의 문제인데, 어떻게 남의 평론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 있겠느냐”는 반응을 나타냈다. 즉 평론을 ‘논리’나 해석학적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취향’과 ‘주관적 판단’ 정도로 치부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엔 기존 평단계가 ‘직관’과 ‘감상’위주로 평론한 탓으로 돌릴 수 있겠지만, 평론가라면 좀더 발전적으로 ‘해석학적 자유’와 ‘취향’의 문제를 구분해 현 비평계를 메타비평하는 것이 요구될 것이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 취재에 협조해주신 분들
강선학, 강수미, 김종길, 김준기, 류병학, 심상용, 유진상, 이선영, 조선령, 최열, 하계훈, 이상 총 11명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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