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8:05 (금)
문화비평_이력서 쓰기와 글쓰기
문화비평_이력서 쓰기와 글쓰기
  • 이병창 동아대
  • 승인 2005.10.0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요즈음 대학마다 글쓰기 교육의 열풍이 불고 있다. 글쓰기라는 이름으로, 아니면 사고와 표현 등 그와 유사한 이름으로 교양필수 과목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아예 인문 계열 글쓰기, 자연 계열 글쓰기, 사회 계열 글쓰기 등으로 분화되기도 한다. 그간 교육의 상품화, 학생  소비자의 선택권 운운하면서 철학 및 역사 과목이 교양필수에서 추방된 이후 얼어붙었던 대학 교재 시장조차 글쓰기 과목이 필수화 되면서, 물때 만난 것처럼 부산하게 돌아간다. 

인문학, 그 중에서도 누구나 고개를 갸우뚱하는 철학을 전공하는 필자는 이 갑작스러운 열풍 앞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그 사람들이 엊그제만 해도 재벌의 말 한마디에  원어민 동일화 교육이다, 재벌 (입)맞춤교육이다 떠들지 않았던가. 근데 아니, 갑자기 무슨 신명이 뻗치고 얼마나 오지랖이 열렸기에 인문학의 정화라 할 글쓰기를 그토록 감싸고 돈 단 말인가. 혹시나 오랜 불황에 지친 출판사들이 대학 교재 시장을 열어 보려 꾸민 음모가 아닐까. 

그거야 여하튼, 얼씨구나 좋은 일이다. 마침 필자도 글쓰기 교재 편찬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감읍한 나머지 며칠 전부터 회의 날짜만 기다렸다. 이거 남들이 알면 얼마나 웃겠나마는, 그 전날 밤엔 정말 잠이 안와, 혼자 자가 제조 폭탄주 한잔 마시기도 했다.

드디어 기다렸던 회의 날 필자는 짐짓 겸손한 척하면서 그러나 남몰래 미소를 지으며, 회의에 참석한 분들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영문으로 글쓰기가 필수화된 겁니까? 그때 나는 사실 지금까지 자기를 성찰하며 사회와 역사를 돌아보며, 창조적 학문에 대한 열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보다는, 재벌의 돈벌이의 노예가 되고, 세계화에 약삭빠른 눈치꾼을 만들기에 주력해온 우리 대학의 교육에 대해 정말 크게 한번 비판하고, 마지막으로 비록 늦었지만 그래도 제대로 돌아왔으니, 우리 이제 정말 좋은 교재를 하나 만들어 보자, 이렇게 분연히 선언하려고 했다. 그때 누가 한 사람이라도 필자를 돌아보면서 그윽한 눈길을 주기만 했다면 그랬을 거란 말이다.

그러나 정말 유감스럽게도, 아무도 필자를 돌아보지 않았다. 필자는 그들의 얼굴이 어둡게 일그러져 있는 걸 보았다. 아마 그들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을까. 무슨 저런 개똥 철학하는 놈들이 아직도 살아남아 있어? 저런 놈들 때문에 이 절대 경쟁 교육시장에 우리 대학이 밀리고 있는데 말이야, 총장은 대체 뭐하나….

그때 자상한 한 동료 교수가 필자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 그걸 아직 몰랐소? 이게 다 재벌이 시키는 거요. 그 분들 얘기가, 인재랍시고 대학 졸업자를 뽑아 보면, 글쎄 보고서나 기획서조차 제대로 못하는 건 제쳐두고, 자기 이력서조차 제대로 못쓴다 하여, 대학보고 당신들 교육 제대로 하라 했다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모인 거요. 그러니 흰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자 그럼 ‘이력서 쓰는 법’ 장은 누가 맡을 거요? 

그때 필자의 숨통을 돌멩이처럼 틀어막는 그 참담함을 어찌 또 말하겠는가. 아, 존재자의 존재를 명상하는 이 철학자가, 고작 이력서 쓰는 걸 가르쳐야 하는 구나. 이렇게 속으로 되뇌면서 필자는 말문을 닫았고, 어떻게 이 자리를 사퇴해야 하나만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나 아뿔싸,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닌가, 그러니 그 놈의 이력서 쓰는 법을 차라리 내가 써보면 어떨까. 생각해보니, 용기가 난다. 이력서라, 그거 좋지. 소크라테스도 먼저 자기를 알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력서라는 제목으로 자기를 성찰하는 법을 가르치면 되지 않을까. 아, 또 있다.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에서 학생들이 세운 실험대학에서는 모든 입학생들이 정신분석을 받게 했다지 않는가. 그러면 저 무지한 입시에 희생된 우리 신입생도 이력서 쓰기 시간에 정신분석을 받게 해야 하지 않을까.

어때? 글쓰기 교육을 베풀어 주신 친절한 재벌 씨, 정말 어떻게 생각하시니? 아직도 이력서 쓰기가 글쓰기로 보이시니?

이병창 / 동아대·철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