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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탐심
라디오 탐심
  • 이지원
  • 승인 2021.12.10 1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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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호 지음 | 틈새책방 | 304쪽

 

- 세상의 지문이 묻어 있는 물건, 라디오에 관한 27가지 이야기

- 2021년 중소 출판사 출판 콘텐츠 창작 지원 사업 선정작

여기 라디오라는 물건에 푹 빠진 이가 있다. 1,000대 이상의 라디오를 모아 안식처까지 만들었다. ‘모던춘지’라는 이름을 붙인 30평 정도의 공간에는 시대를 풍미한 빈티지 라디오가 가득하다. 100년 전에 만들어진 진공관 라디오부터 IC칩의 시대를 연 트랜지스터라디오, 저항의 상징이었던 붐 박스와 예술품으로 인정받는 라디오까지, 세상의 모든 라디오가 모여 있다. 이 공간을 만든 저자 김형호 씨의 직업도 라디오와 인연이 꽤 깊다. 현재 〈MBC강원영동〉에서 방송 기자로 일하고 있다.

“이런 물건을 혼자만 보고 즐기는 것은 이기적이고 세상에 대한 배신입니다.”

‘내 열정과 내 돈’으로 세상의 모든 라디오를 수집하기에 급급하던 이가 마음을 바꿔서 라디오와 관련한 지식을 공유하기로 한 것은 이 한마디 때문이었다. 사라져가는 인류의 유산을 모두가 함께 보고 즐기며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공감한 것이다. 저자는 “당장 라디오 박물관을 열지 못한다면 글이라도 써 보자는 생각으로 블로그에 몇 자 끄적이다 책을 쓰게 됐다.”라고 말한다.

《라디오 탐심》은 라디오라는 물건을 통해, 지난 100년간 인류가 거쳐 온 세월의 흔적을 읽는 책이다. 라디오라는 물건이 탄생과 성장, 전성기와 쇠퇴기를 거치는 동안 인간, 그리고 사회와 어떤 상호 작용을 하고 무슨 유산을 남겼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게 해서 모은 게 27가지의 에피소드다. 

허름한 대우전자 라디오에서는 어부였던 아버지의 고단한 삶이 묻어 있고, 70~80년대 광산 지역 유행했던 붐 박스에서는 “오늘도 살아남은 것에 감사”해 하는 광부들의 나지막한 읊조림이 들린다. ‘괴벨스의 주둥이’라 불리는 독일 국민 라디오에는 전체주의 사회로 나아가려는 나치 독일의 야망이 보이고, ‘우리 동네 이름’을 라디오 모델명으로 명명하는 어느 독일 라디오 회사의 행동 속에서는 오늘날 우리의 지역 사회와 향토 기업의 관계 설정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말하자면 저자에게 라디오들은 단순한 공산품이 아니다. 당대의 시대적 맥락을 담은, 세상사와 인간의 지문이 묻어 있는 물건이다. 여기에 소개된 제품들은 우리 세대를 넘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인류의 유산이기도 하다.

틈새책방은 매력적인 물건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는 테마로 책을 내고 있다. 이 책은 《만년필 탐심》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책이다. 시대적인 효용은 사라진 것 같으나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물건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 물건들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당대에 가장 필요한 물건이었고 그만큼 잘 만들어야 했던 제품이기 때문이다. 만년필은 볼펜이 나오기 전 반드시 필요한 휴대용 필기구였다. 라디오는 전파로 세상의 크기를 줄였고 소통의 수단이었다. 모두에게 필요했던 이 제품들은 경쟁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야 했다. ‘탐심’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 불멸을 얻은 물건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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