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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힐러 여사, 너무 심한 것 아니요?”
“도이힐러 여사, 너무 심한 것 아니요?”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08.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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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최재석 前 고려대 교수, "도이힐러 런던대 명예교수가 내 연구 盜用” 주장

▲사회와 역사 제67집 ©

최재석 前 고려대 교수가 최근 나온 ‘사회와 역사’ 제67호에서 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명예교수에게 단단히 따지고 물었다. 도이힐러 교수가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유교적 시스템이 구축되는가에 대해서 20년을 연구해 펴낸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Havard University Press 刊, 1992; 2003년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으로 아카넷에서 번역됨)가 최 교수의 선행연구에 크게 기대고 있음에도 그 전거를 전혀 밝히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 연구업적인 양 서술했다는 것이다. 아니 최 교수는 도이힐러 교수의 책이 “체계적인 연구방법, 한국인과 다른 시각, 사료와 선행연구에 대한 꼼꼼한 검증”의 高評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해서 심히 불쾌해하며, 도이힐러 저서의 거시적 틀이 이미 최 교수가 지어놓은 밥과 나물, 고기와 찌게를 밥상에 올린 것일 뿐이라는 뉘앙스로 양자의 주요 주장이 어떻게 일치하는지, 어떤 영향과 전유, 모방의 관계에 놓이는지를 탐정처럼 추적해 들어간다.

쟁점 1. 신라 시대의 부계적 요소, 고려의 토지 사유제도

최 교수는 1985년 발표한 논문 ‘新羅時代의 葬法과 喪·祭’(인문논총)에서 신라시대 제도가 부계적 운용인가 아니면 비부계적 운용인가를 따져보았다. 1)신라의 왕위 계승, 2)神宮 제사 3)巨川母·月光의 계보 4)갈문왕 타이틀의 追封 6)五廟制 7)대왕 타이틀의 추봉 8)태자 칭호의 부여 등의 현상을 분석해 그 중 오묘제, 대왕 타이틀, 태자 칭호에서 부계적 원리를 발견하였다. 그런데 최 교수는 도이힐러가 문제의 저서 128쪽에서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부계의 침투는 시작된다”라고 주장하면서 아무런 근거와 전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라고 지적한다.

최 교수는 토지 사유화의 역사적 시초에 있어서도 학계의 통설을 뒤집은 바 있다. 1981년까지 “고려 말에 이르러서야 토지가 자녀 균등 상속제로 이뤄졌다”는 하타다 다카시의 주장이 넓게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최 교수에 의해 “고려 초기”로 그 시작점이 옮겨졌다. 나아가 최 교수는 1985년 연구에서는 "신라시대에도 토지대장이 존재했고, 買田卷이 있었고, 토지를 신하에 하사하게 했다"라며 신라시대부터 토지사유제가 시작됐다는 점을 주장해 “고려초기설”을 더욱 확고히 했다.

그런데 도이힐러는 “토지의 사유권은 이미 고려 초기부터 존재해왔다고 여겨진다”(76쪽)라고 간단히 주장하고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는데, 이는 최 교수의 연구를 참작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다는 게 최 교수의 주장이다.

쟁점 2. 고려의 立嗣(후계자를 세움), 음서, 喪祭

최 교수는 자신의 1984년 논문 ‘高麗時代の家族と親族 2’에서 고려의 상제에 대해 29쪽에 걸쳐 언급했는데, 도이힐러는 근거의 제시도 없이 1쪽도 미치지 못하는 지면에서 “역사기록은 고려의 장례관습을 상세히 기술하지 않고 있으며”(119쪽), “장례절차는 가끔 몇 개월 또는 1년이 더 걸리기도 하였으며”(121쪽), “대개 화장하고 유골은 사찰에 임시 안치했다가 매장했고, 사찰이 후손들에게 위임받아 관리했다”(121쪽)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계속 지적했다. 이런 주장은 모두 최 교수가 1984년 논문에서 새롭게 밝힌 것들인데 도이힐러의 책에서는 최 교수에 대한 언급은 여전히 빠져있다는 것이다.

쟁점 3. 조선 친족구조 및 17세기 사회구조 변화

최 교수는 계속 이어서 조선시대의 친족구조, 즉 문화 유씨 족보, 족의 개념, 부모 재산의 표현, 장자 봉사, 외손 봉사, 자손의 개념, 宗의 분파 현상에 있어서 도이힐러가 아무런 전거 제시 없이 최 교수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혹은 최 교수의 주장을 약간 윤색한 주장을 펼쳐나가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도이힐러 런던대 명예교수 © 신동아
그런데 도이힐러는 자신의 저서에서 최재석 교수를 3번 언급하고 있다고 최 교수는 밝힌다. 이 세 번은 모두 도이힐러가 최 교수를 비판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도이힐러가 “최재석은 (남편의) 처가 거주는 부인이 남편 집으로 귀환하면서 끝이 난다고 하였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102쪽)고 비판하면서도 뒤에서는 “외가에서의 생활은 부친이 자신의 출생집단 가족을 데리고 돌아오면서 끝이 난다”(123, 329쪽)라고 두 번에 걸쳐서 주장을 번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본관의 목록을 가지고 통혼권을 설명하지 못한다”라며 최재석 교수를 비판하기도 했는데, 최 교수는 자신이 이미 “배우자의 본관을 가지고 혼인권을 파악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문제”라고 1975년의 논문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최재석은 제사 윤회의 중요성을 고찰하지 않았다”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최 교수는 자신이 여섯 측면에서 그 의의를 짚어보았음을 강변했다.

최 교수는 자신에 대한 도이힐러의 비판이 “자기의 주장이 최재석의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취해진 계산이 아닌가 한다”라고 결론지으면서 도이힐러의 핵심주장에 대한 검토로 나아간다.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이라는 책의 핵심의 하나는 “고려사회는 법제와 관행의 두가지 요소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이 두 용어는 자신이 창안한 것인데 도이힐러가 가져다가 썼으며(법제는 legislation으로, 관행은 practise로), 영문 책의 제목에서는 Ideology와 Society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비판한다.

도이힐러의 또 하나의 핵심주장은 “17세기에 친족구조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 교수는 도이힐러가 17세기에 장자 우대 불균형 상속제, 출계집단의 구조 엄격화, 남계친과 비남계친을 추적 기록하는 계보 확립 등이 이뤄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1984년에 발표된 최 교수의 논고 내용과 “거의 같다”라고 폭로하고 있다. 이 때 최 교수 논문의 제목은 ‘17세기의 친족 구조의 변화’였다.

맺음말에서 최 교수는 “도이힐러가 저서에서 다룬 핵심분야는 고려사회는 법제와 실제(관행)의 두 원리로 운영된다는 것과 17세기에 이르러 친족구조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인데 이는 모두 최재석의 1985년, 1984년 논고의 내용과 일치한다. 참고문헌을 꼼꼼히 챙기는 도이힐러가 이 두 논고만은 아무 곳에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라고 꼬집기에 이른다. 최 교수는 “세상에는 비밀이 없는 법인데, 남이 한 연구 결과를 자신의 것으로 도용하더라도 그것을 하버드에서 출판하면 영원히 비밀이 지켜질 것으로 생각하였는지 궁금하다”라고 말을 맺고 있다.

이런 원로학자의 강력한 문제제기에 대해서 학계는 일단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도이힐러 밑에서 박사를 받았고, 그녀의 책에 대해 서평을 쓴 바 있는 한 교수는 “이미 통설이 돼 있는 것에 대해서 각주를 달아야 하나”라고 말했다. 또 다른 서평자는 “글을 읽지 않아서 뭐라 말하긴 힘들지만, 최 교수의 연구는 너무 방대한 반면 허점도 많을 수 있다. 표적에다 기관총을 난사하면 여러 발이 표적에 맞는다. 하지만 그것은 표적을 정확히 겨냥한 것이라 볼 수 없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전통 가족에 대한 연구에서 최재석 교수의 선구적 업적을 부정할 이는 흔치 않을 것이다. 다만 최 교수의 선행연구가 후학들에 의해 학습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해 보강돼 나갔는데, 과연 도이힐러 교수가 책에서 펼친 문제의 주장들이 학계에 일반화된 공공적 지식(public domain)을 가져다 쓴 것인지, 아니면 최재석 교수의 책에 실제로 많이 의존했는지의 여부는 밝혀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 이유는 해외의 한국학 연구자들에 대한 국내의 인식이 깊이가 없고 얇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碧眼의 연구자들이 연구한 것이면 ‘한수 접고’ 들어가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의 한국학자들은 한국 연구자들의 논문을 인용할 때 1차적 사실확인용으로만 인정해주지, 실증을 통한 주장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라는 인식이 보편화돼 있을 정도다. 이는 한편으로 국내 연구자들의 연구가 실증적 확인에 그쳐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준 공주대 교수(사회사)의 “외국의 많은 한국학 연구자들이 조선의 특수한 문맥을 무시하고 자신들 입맛대로 여러 사실들을 가져다가 이론에 끼워맞추는 연구를 하고 있다”라는 말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최근 강해지고 있는 이런 불만이 실제현실과 일치하는 지는 한국어에 유창하고, 남편이 한국인이며, 한국에도 자주 다녀간, 비교적 한국통이라고 알려진 도이힐러 교수의 연구 수준을 꼼꼼하게, 객관적으로 재검토 해본 다음에야 어떤 결론이 내려질 듯하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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