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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 '과거 형식주의' 꾸짖는 준엄한 문학정신
화제의 책: '과거 형식주의' 꾸짖는 준엄한 문학정신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06.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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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출판사의 겨레문학선집 출간 가속도

화제의 책
『이규보 작품집(1~2)』(이규보 지음, 김상훈 외 옮김, 보리 刊, 2005, 586쪽)
『길에서 띄우는 편지』(이제현 지음, 신구현 외 옮김, 보리 刊, 2005, 536쪽)

북한 문예출판사가 펴낸 ‘조선고전문학전선집’을 다듬어서 펴내는 ‘겨레고전문학선집’이 벌써 7권째를 맞았다. 지난번 박지원의 ‘열하일기(전3권)’와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에 이어 이번에는 이규보의 ‘동명왕의 노래’, ‘조물주에게 묻노라’, 이제현의 ‘길에서 띄우는 편지’ 3권을 펴낸 것이다. 북한의 이 선집은 지난 1983년부터 홍기문, 리상호, 김하명, 김찬순, 김상훈 등의 뛰어난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펴내기 시작한 것으로 옛글을 오늘의 것으로 바꾸는 것에 있어서 자연스러움이 특히 돋보인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시인인 이규보는 평생 8천여편의 시를 지었으며 이 가운데 2천여편이 전한다. ‘동명왕의 노래’는 고구려 건국신화를 장쾌하게 읊은 서사시 ‘동명왕의 노래’를 포함해 260편의 시를 번역했고, ‘조물주에게 묻노라’는 1백35편의 시와 50여편의 산문들로 이뤄져 있다. 전체 작품 가운데 진수만을 모은 것이다. 이규보의 시는 당시 과거 시 문체의 형식주의에 대한 멸시의 감정에 기반하고 있다. 사회비판적 안목과 30대 이후 곡절 많은 벼슬살이에서의 심각한 생활체험으로 인해 다양한 소재와 심경을 표현하는 그의 시는 사실주의적 곡진함으로 호소력을 발휘한다. “더욱 버려야 할 것은 깎고 아로새겨 곱게만 하는 버릇”, “겉으로는 울긋불긋 단청을 하고 내용은 한때 산뜻한 것만 찾누나” 등에서 문학의 사회적 미학과 정서적 교양의 기능을 중시하는 그의 문학관이 잘 드러난다. 산문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그가 ‘白雲居士’라는 호를 짓게 된 배경을 토로하는 대목이다. “대체로 구름이라는 것은 뭉게뭉게 솟고 훨훨 피어서 산에 걸리거나 하늘에 매이지 않고 동으로 서로 마음대로 가고 오는 데 거리낌이 없다. 또 잠깐 동안에 변화하여 앞뒤를 짐작할 수 없으며 활활 퍼질 때에는 군자가 세상에 나타난 것 같고 슬며시 걷힐 때에는 고인이 종적을 감춘 것 같으며 비가 되어서는 가물에 마르던 것을 살리니 어질다 할 것이요, 와도 반갑지 않고 가도 그립지 않으니 탁 트였다 할 것이다”(‘백운거사라는 호에 대해’ 중에서)

북경의 만권당에서 한족 학자들과 널리 어울리며 글을 쓰고, 고려의 대변인으로 다섯 차례나 중국을 오가며 수많은 시를 남긴 이제현은 사리화, 거사련, 처용가 같은 백성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기록으로 남겼으며, 기이한 이야기와 시화를 모아 ‘역옹패설’을 엮은 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시와 산문의 정수를 보은 ‘길에서 띄우는 편지’는 고려 말의 혼란기를 조국에 대한 애정으로 살아냈던 한 지식인의 내면을 보여준다. “말과 수로 오고가는 함곡관 길에 / 몰아오는 먼지가 옷깃에 쌓이누나 / 이 세상 반쯤이나 두루 돌아다녔어도 / 마음은 물길 따라 고국으로 향하누나”, “요 못된 참새야 너 어디를 싸다니누 / 한 해 농사 어떤 건지 모르고 / 늙은 홀아비 홀로 가꾼 밭인데 / 조며 기장이며 다 까먹어 치우누나”(‘사리화’) 등에서 진보적 지식인의 정신과 애민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인용한 시에서 보듯 물 흐르듯 부드럽고, 한글의 옛날 어투가 구수하게 남아있는 번역을 통해 고려 문인들의 내면이 한껏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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