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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_나의 동남아 사랑과 연구
학이사_나의 동남아 사랑과 연구
  • 조흥국 부산대
  • 승인 2005.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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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동남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강의를 할 때 나는 학생들에게 캄보디아의 고대로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설명하던 중 이 나라 사람들이 겪은 비극이 내 마음에 와닿아 슬픔이 북받쳤던 적이 있다. 13세기까지 수백 년간 강한 국력으로 대륙동남아의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찬란한 앙코르 문화를 건설한 캄보디아는 15세기에 들어서서 태국의 속국이 되더니 17세기부터는 베트남으로부터도 간섭을 받기 시작했다.

그 이후 캄보디아 사회는 태국 편과 베트남 편으로 갈라져, 19세기 중엽까지 분열과 내전의 역사를 겪었다. 캄보디아는 그 후 약 1백년간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다가 1954년에 독립했지만, 곧 인도차이나반도에 불어 닥친 냉전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갔다. 특히 베트남전쟁 기간 캄보디아 사회는 우익과 좌익으로 분열되었다.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나자, 크메르루즈라는 공산주의자 집단이 정권을 장악한 후 소위 킬링필즈의 동족간 대학살이 일어났다.

불과 3년 반의 기간이지만 크메르루즈의 ‘석기시대적’ 공산주의 사회건설을 위한 시도에 희생되어 인구의 4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크메르루즈 정부의 사회주의 정책과 공포정치로 인해 캄보디아 사회가 공동체의 파괴와 가족간 반목 및 분열과 개인의 심리적 황폐화를 겪었다는 점이다. 캄보디아 사회의 분열은 1979년 베트남에 의해 정복된 후에도 십여 년간 계속되었다.

피지배와 전쟁과 학살과 분열의 후유증은 오늘날에도 이 나라의 정치판과 경제적 상황과 각종 사회문제에서 나타나며 특히 캄보디아 사람들의 눈빛에서도 읽어진다. 나는 그 날 강의 후 내 스스로가 캄보디아를 많이 아끼고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감정은 비단 캄보디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베트남, 태국,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의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있다.

나의 동남아 공부는 독일 유학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전혀 배우지 않은 동남아와 나와의 사이는 처음에 매우 서먹했다. 독일인들과 한국 교민들은 나에게 동남아학이 무엇을 배우는 것인지 그리고 심지어는 독일까지 와서 왜 하필이면 동남아를 공부하느냐고 물었다. 그럴 정도로 동남아 연구는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고 인정되지 않았던 전공 선택이었다.

그러나 동남아와 부전공으로 택한 인도의 여러 언어들과 역사와 종교와 민족과 사회 및 정치에 대해 공부해가면서, 나는 동남아 연구의 풍부함과 재미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1990년대 초에 한국에 돌아와 보니 동남아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세계가 아니었다. 그러한 사정이 지금도 크게 달라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동남아 공부의 보람을 한국 사회에 동남아를 제대로 알리는 데서 찾아 왔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서의 강의와 연구 외에도 수 년 전에는 동남아선교정보센터를 세워 동남아에서 활동하는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동남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스스로를 ‘동남아 전도사’로 자처하곤 한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나라에 동남아를 사랑하고 진지하게 연구하는 ‘동남아 전도사’들이 꽤 많이 생겨났다.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모른다.

조흥국 / 부산대 동남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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