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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을 업은 '비판이성'의 출현
루쉰을 업은 '비판이성'의 출현
  • 황희경 영산대
  • 승인 2005.05.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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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죽은 불 다시 살아나』 왕후이 지음| 김택규 옮김| 삼인 刊| 623쪽

루쉰의 산문시집인 ‘들풀(野草)’에는 ‘죽은 불’이라는 시가 있다. 내용은 이렇다. 꿈 속에서 루쉰은 거대한 얼음산의 계곡에 떨어져 죽은 불을 만난다. 죽은 물이라고 할 수 있는 얼음 속에 둘러싸여 산호초처럼 꽁꽁 얼어버린 죽은 불을. 안타까운 마음에 집어들어 호주머니에 집어넣자 죽은 불은 다시 살아나 루쉰과 대화를 시작한다. 알고 보니 사람들에게 버려진 불이었다.

계곡에서 빠져나오려는 루쉰은 죽은 불에게 권유한다. 함께 가자고. 죽은 불은 주저한다. 빠져나가자니 장차 다 타버려 죽을 것이고 그냥 있자니 얼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불은 결국 타버려 죽기를 선택한다. 죽은 불은 붉은 혜성처럼 루쉰과 함께 계곡을 빠져나왔으나 루쉰은 곧바로 돌수레에 깔려 죽는다. 그리고 루쉰을 치어죽인 돌수레는 얼음계곡에 떨어져 버린다. 죽어가면서 루쉰은 회심의 붉은 미소를 짓는다. 너희들은 더 이상 죽은 불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여기서 돌수레는 그를 둘러싼 강포한 세력을 상징하고 있으며 죽은 불은 억압된 열정이며 절망에 포위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타 죽어갈 것을 알면서도 얼음계곡을 빠져나간 죽은 불의 선택은 절망에 대한 반항이며 적극적 有爲를 선택한 루쉰의 인생태도이다. ‘희망’이라는 시에서 루쉰은 노래하지 않았던가. 절망은 허망한 것. 마치 희망이 그러한 것처럼이라고. 범상치 않은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의 저자 왕후이는 본래 루쉰의 연구자였으나 현재 중국사상계의 ‘천하제일검’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는 1980년대 중국의 젊은이들의 영혼을 개혁 개방한 사상계의 ‘덩샤오핑’이요 ‘당대의 량치차오(梁啓超)’라고 평가받는 리쩌허우(李澤厚)의 말이고 보면, 그가 중국 학술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어떠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리쩌허우도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제 강호에서 은퇴해 과거 자신이 사용했던 ‘초식’의 체계화에 매달리고 있다면 왕후이는 바야흐로 강호를 휘감는 논쟁의 초점에 있는 인물이다. 그는 10년째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잡지인 ‘독서’의 집행 주편을 맡고 있으면서 얼마 전 파격적 대우로 칭화대학의 인문사회과학대학 교수로 부임했다.

그러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 그는 여전히 죽은 불의 비애를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얼음산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의 2장에 실려있는 ‘오늘날 중국의 사상 동향과 현대성 문제’라는 논문으로 이른바 ‘신좌파’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지목되어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집중적인 포화를 받았다. 문화대혁명을 겪어보지 못해 중국의 현실을 모른다느니 서양사상의 틀로 현실을 재단한다는 등의 비판이 그것이다.

일찍이 왕후이는 문화혁명을 통해 마오쩌뚱에 의해 신화화된 루쉰을 회의하는 분위기 속에서 다시금 죽은 불이 되어버린 루쉰과 새롭게 만나게 됐다. 그가 루쉰의 문학작품과 사상 속에서 주목한 것은 전통에 반대한 계몽적 주장이 아니라 중국 역사와 현실에 대한 루쉰의 깊은 통찰, 한 지식인의 영혼 깊숙한 곳에 자리한 어두운 기억에 대한 발굴, 지옥과 천당의 기운이 혼합되어 있고 절망과 희망이 뒤엉켜 있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로 하여금 루쉰과 멀어지게 하기는커녕 더욱 루쉰의 매력에 빠져 들게 했다. 루쉰에 대한 이러한 애정이 이 책의 1/5에 해당하는 2부의 소제목을 책의 제목으로 승격하게 했으리라.

그가 되살리고자 하는 것은 바로 역사와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출현한 정당화의 지식과 불평등 관계의 은밀한 결탁을 폭로한 루쉰의 사상적 유산이다. 그는 루쉰의 이러한 사상적 유산이 오늘날 지식인들의 비판사상의 중요한 원천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지식에 대한 아주 고약한 태도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지식을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권위를 증진시키는 도구로 대하는 자세다. 루쉰의 문화적 실천은 개혁?개방시대의 수혜자로서 직업화의 지식 생산 과정에 몸담고 있는 지식인들에게 오늘날 지식 생산 방식의 한계와 사회적 함의를 사유하도록 촉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루쉰의 사상적 유산을 이어받아 결코 ‘죽은 불’이라고 할 수 없는 현대성의 문제를 천착한다.

이 책의 대부분의 내용도 현대성의 문제를 다룬 것이다. 그런데 현대성에 대한 성찰은 신자유주의 비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현대성에 대한 논의는 민족주의, 세계화 문제, 소비주의와 현대화 이론 그리고 서구 중심주의 등 다양한 차원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는 발전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현실적 측면에 주목한다. 현대라는 개념은 개선 혹은 개량, 진보, 전통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개념으로 그 기저엔 단선적인 시간관과 목적론적인 역사관을 깔고 있으며 현대화 이데올로기에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주의는 이미 현대사회의 보편적 이데올로기가 됐다. 그리하여 발전주의는 정치 경제 문화 개혁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거부하는 구실이 되고 국가 혹은 지역 간의 차이를 무시하고 성공한 발전 모델을 보편적인 발전 모델로 취급해 모든 국가와 지역에 적용시켜 버리는 특징을 갖는다. 발전주의 안에는 일종의 제국주의적 혹은 식민주의적 논리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포괄적인 각도에서 현대성을 고찰해볼 때 현대성은 그 안에 내적 긴장과 모순을 배태한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반대하는 전통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대성을 반성하는 시각은 개혁 개방 시대의 자기확인으로 전락한 1980년대의 전통/현대이나, 중국/서방의 이원론에서 탈피하는 열린 지평을 제공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현대성에 반항했던 루쉰을 비롯한 다양한 중국 사상적 전통과 서구의 지적 유산이라는 죽은 불을 신자유주적 ‘세계화’를 비판하는 살아있는 불꽃으로 지피기 시작한 역작이다. 사실 죽은 불은 죽은 불이 아니었다. 단지 타오르기를 멈춘 불이었다. 다시 타오를 수 있을지는 비판적 지식인의 실천에 달려 있는 것이다.  

 
황희경 / 영산대 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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