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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_매체의 안팎
문화비평_매체의 안팎
  • 김영민 한일장신대
  • 승인 2005.04.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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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와 기호가 현대 인문사회과학적 관심의 전일적 화두가 된지 오래다. 굳이 모종의 관념론자가 아니라도, 진리나 사물, 인간이나 세계가 모두 대중 매체의 前의식적 승인 아래 가능해진 기호론적 효과 속에서 나날이 물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못한다. 자본이나 기계와의 싸움 이상으로, 매체와의 싸움은 바로 그 매체적 전체성의 효율 탓에 눈에 띄지 않게 무기력해지고 있다. (맥루한의 말처럼, 바로 그 무기력이야말로 매체 현실의 목적론적 메시지가 되어 우리 앞에 드러난다.) 외부(타자)를 쉼 없이 삼투해 들이는 매체의 공룡같은 자기동일화는 매체의 무비판성을 유일한 비판성으로, 그 무의미를 유일한 의미로 재생산한다.

꼬리를 내린 과거의 투사들은 '매체야 놀자'라면서, 포스트모던적 幼兒로 변신하고 있고, 기껏 대중 매체나 기업체가 던져주는 의제와 이슈에 매달려 '진보적으로' 기식하고 있다. 매체저항적이던 북한이나 일부 종교 근본주의 사회들도 자본주의의 혈맥인 신매체를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 와중에 인터넷 정치는 소수자들의 탈주선으로 위험한 그네뛰기의 곡예를 계속하면서, 그 가능성의 명암을 활발하게 실험한다.

확실한 것은, 매체와의 싸움이 무매체를 향한 낭만적 직접성의 세계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비현실적이며, 심지어 반자연적이다. 굳이 여러 이론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매체 인문학은 인간의 존재와 그 관계가 곧 갖은 매개의 네트워크 속에서 생성하는 일련의 結節이라는 사실을 정밀하게 제시한다. 기표의 연쇄 속에서 주체의 명멸을 얘기하듯이, 매개의 상호조회망 속에서 우리의 존재는 그 무늬(人紋)를 엮는다.

예컨대, 매체를 버리고 존재의 음성을 청종하려던 하이데거 식의 철학적 기획은 파시즘 앞에서 실수했고, 또 무력했다. 마찬가지로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朗)의 '無의 장소' 논리 역시 대동아공영권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다. 굳이 덧붙이면, 미당의 詩 역시 그같은 오류에서 멀지 않았다. 매체는 매체로 싸워야 한다는 것은 단지 전술적 '당위'가 아니다; 그것은 당위 이상으로, 현대가 구성한 새 현실의 자연사적 이치일 뿐이다.

1980년 광주의 5월과 1968년 파리의 5월은 이에 대한 적절한 방증이 될 법하다. 당시의 대중 매체가 권력에 저당 잡힌 필터가 되었을 때, "오월의 진정한 혁명 매체는 담벼락과 벽보, 유인물 또는 삐라, 발언이 행해지고 교환되는 거리"(보드리야르)로 다시 내려왔다. (물론, 지금의 거리야 오히려 자본주의적 재생산이 확산되는 소비사회의 전시공간에 불과하지만.)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반군 지도자 마르코스의 말은 같은 맥락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그러나 이제는 대중 매체가 우리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좀 이상한 이유에서 사파티스타는 미래를 향해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근자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가 어렵게 합의해서 소출력 라디오의 지상파 방송 사업을 허가했다. 4~5월에 걸쳐 도합 8개의 소출력 라디오 방송이 차례로 개국할 것이라고도 한다. 이른바 '동네방송'의 시대가 도래한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필시 이 동네방송들도 매스 미디어의 바깥으로 외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신화와 예술이 오히려 국가에 복무하듯이, 다양성 역시 그 체계의 변명으로 수렴되고, 소수자의 담론은 필경 제 나름의 과거에 볼모잡힐 지도 모른다.

기존의 권력이 언죽번죽 수행하는 자기 자신에 관한 거울상-담론인 대중매체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작은 양심의 지도자’(부르디외)로 군림하면서 同意의 지배를 계속하고 있는 대중매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人紋의 전술은 무엇일까. 대중매체의 강박적 자기동일화를 넘어 '숨어 들어가는 타자'(레비나스)들과 조우하는 외상적 진실의 체험은 어떻게 가능해지는 것일까.

김영민 / 한일장신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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