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09:55 (금)
메타비평: 비평에서 '감성'은 어떻게 추구되어야 하나
메타비평: 비평에서 '감성'은 어떻게 추구되어야 하나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5.03.2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감성의 건강함이 '서정의 진실'로 가는 지름길

▲ © 일러스트 이재열
비평에서 논문식 글쓰기는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특정한 이론틀을 가지고 연역적으로 작품을 해석해내는 ‘뻔한’ 관행이 그 미흡함을 끊임없이 질타받으면서도 계속 유지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혹시 비평에서 ‘이성’의 영역이 너무 강조되다보니 그런 것은 아닐까. 감성의 영역이 ‘수사적 글쓰기’와 동일시되면서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면서 이런 구도의 고착화를 방치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비평에서 감성의 영역은 어떻게 추구되고 강조되어야 할 것인가. 여기 비평가들의 고민을 모아봤다. /편집자주

 

비평의 소외현상, 비평에 대한 신뢰상실 같은 것들은 주로 두가지 차원에서 전개된다. 하나는 ‘작품을 보는 정확한 눈’의 부재에서, 다른 하나는 ‘글쓰기’의 차원에서다. 후자는 비평의 예술적 가치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다. 이는 비평이 어느새 논리와 이성에 억눌려, 하나의 예술작품에 대한 감흥을 드러내지 못하는 메마른 글쓰기로 일관한다는 비판과 함께 한다. 이런 비평들은 비평의 품격뿐만 아니라 그 대상이 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흥미조차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겹겹의 문제를 낳는다.

이런 가운데 비평에서 감성의 영역을 재성찰해야 한다는 지적들이 나온다. ‘비평적 감수성’이 본질을 알아차리는 예민함이라면 ‘감성’은 독서과정에서 생기는 인간적인 희노애락의 집결지다. 이것은 그 동안 비평적 수사와 한 데 묶여서 도매금으로 넘겨진 바가 크다. 하지만 ‘수사’와 ‘감성’의 영역을 구별해서 후자를 건강하게 추구하는 일이 비평의 존재감 회복에 있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감성적 흔적이 두드러지는 비평가는 이명원 씨다. “가장 투명한 내면을 가진 비평가”라는 평을 얻는데 자신의 뿌리를 곧게 하고 이로써 하나하나의 작품에 다가가는 태도로 독자의 마음을 이내 사로잡는다. 이명원의 비평은 현실의 소용돌이 속에서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논리로 헤쳐 나가려는 글쓰기이기도 한데, 즉 이성과 감성의 줄타기를 잘 함으로써 ‘비평적 감수성’을 잘 발휘하고 있다.

유종호 교수와 황현산 교수는 한참 윗세대지만, 많은 평론가들이 여전히 감성적 글쓰기의 모범으로 꼽고 있다. 사실 유 교수와 황 교수가 ‘감성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요즘 세대와는 달리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낸 데서부터 비롯된다. 시대의 갈등이야 얼마나 복잡하던 간에 자신의 입장만 분명히 한다면 비평가의 독특한 문체는 수사에 그치지 않고 내밀한 목소리가 곧 독자들의 감성을 건드리는 곳까지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김명인 인하대 교수와 촉촉한 글쓰기로 가슴을 건드리는 손종업 선문대 교수도 빼놓을 수 없다. 평론가들은 손 교수의 비평에 대해 “리버럴리스트로서의 내면풍경을 잘 드러내 해석적인 차원에서 탁월한 힘을 발휘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감성적인 면들이 때론 비평의 날카로움을 뭉툭하게 할 때가 있다”라는 몇몇 지적들은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균형감을 취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있다. 김명인의 비평은 ‘화두의 비평’이다. 그는 유장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비평가로, 비평적 개념을 장악하는 힘은 비평대상과의 실존적 만남이 두드러지는 내면의 풍경을 연출한다.

비평에서 ‘감성’의 영역을 강조할 때 이것은 수사학적 글쓰기로 오해받고 실천되기도 했다. 수사학적인 비유와 문맥의 高度 조절, 표현의 완급 같은 것은 글쓰기의 즐거움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하지만 비평대상과 독자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견지하는 ‘비평가적 진심’과 거리가 먼 기교들은 감성의 발휘와는 거리가 멀다. 90년대를 가로지르며 텍스트에 대한 연애감정의 절정을 보여줬던 남진우 서울예대 교수는 감성적인 비평가 목록에서 빠질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최근 비평들이 작품의 수준과 관계없이 과잉된 표현과 기교들로 그것들을 감싸고 있어 비평적 정신을 흐리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미술영역은 이론적 글쓰기에의 경도와 혹은 인상주의 비평이라는 극단적 풍경이 너무 길게 이어지고 있다. 정치한 서술과 대상에 대한 문체론적 감싸기가 돋보이는 비평가로 이영철 계원조형예대 교수가 손꼽힌다. “단문과 복문을 자유롭게 오가는 그의 글은 분명한 문체의식과 함께 감성의 영역을 잘 건드린다”라는 평을 얻는다.

심상용 동덕여대 교수는 시대에 대한 비판의식을 분명히 드러내면서도 작품 하나하나 속에서 그런 시대의식을 소화시켜 읽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그의 글은 “느낌표와 물음표로 연발되면서 탄식의 소리가 너무 잦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의 글쓰기가 단아하고 간결한 비평들보단 그 맛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류병학 씨의 비평은 호흡이 길고, 집중력이 있고, 문헌적 전거에 대한 집요한 구석이 돋보인다. 구어체를 문체적 특징으로 삼고, 자신의 논지를 부각시키는 데 적절하게 활용하는 재치가 독특한 글쓰기를 만드는 그는 “모든 견고한 것들을 픽픽 쓰러지게 만드는” 경쾌한 감성의 한 사례로서 추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평단의 견해다.

무용계엔 정평이 나있는 평론가가 한둘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를테면 문애령 씨가 그 중 하나인데, 그의 비평은 매우 ‘정확하다’라는 평을 얻는다. 그러나 ‘정확성’과 ‘감성’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감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허명진 씨의 비평들이 이를 잘 드러낸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는 ‘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생활세계’라는 입장에서 춤을 본다. 특히 “움직임을 포착하는 수준”이 다른데, 시공감각적인 복합성으로 감성을 전달해 ‘몸감’의 탁월함을 인정받는다.

비평에서 ‘감성’의 영역은 몇단계의 전제조건을 충족시키면서 추구되어야 할 우리 시대 비평의 철학적 화두로 인식되고 있다. 그것은 비평대상을 투명하게 인식하는 ‘비평적 이성’과의 공존을 통해서만 시민권이 확보된다. 그리고 작품에 솔직하게 다가가는 과정의 개성적인 전달을 통해서 ‘감성’의 영역은 자연스럽게 문체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비평가들이 말하는 비평의 '감(수)성'

김진석 인하대 교수(철학, 문학평론가)

“요즘 젊은 비평가 그룹은 이전 세대에 비해 자유롭게 글쓰는 포지션이 되지 않다보니, 즉 현실의 복잡한 리얼리티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보다 정확히 정하지 못하다보니, 자신의 주관성을 드러내는 글, 나아가 비평의 감성적인 면을 드러내는 것에 약한 듯하다.”

손종업 선문대 교수(국문학, 문학평론가)
“주관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양파껍질 벗겨내는 것처럼 끝이 없고 수사학에 이르기 쉽다. 내가 보는 비평적 감수성이란 ‘시대와 삶과 동떨어져있을 순 없고 삶의 무엇을 다시 보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명원(문학평론가)
“인식 자체가 정교하고 이를 유려하게 미학적으로 강화하는 것을 감성의 영역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비평들은 논리적인 전달력에서 실패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차원으로까지 문제제기가 되지 않고 있다. 방법론을 먼저 배우다 보니 작품자체를 도식화해서 보게 되고 ‘수사적으로 사기치는’ 문장법들을 먼저 익히게 된다.”

이현식(문학평론가)
“비평적 감수성은 ‘서정적 진실’ 찾기라고 생각한다. 문학 자체의 가치와는 관련 없는 문학 외적 논평과는 달리 오로지 텍스트를 빠트림 없이 향수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즉, 언어 조직의 세목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말의 아름다움과 진정성을 확인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