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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 이종철 연세대인문학연구원 “에세이 철학의 부활로 자유롭고 비판적 글쓰기“
[저자 인터뷰] 이종철 연세대인문학연구원 “에세이 철학의 부활로 자유롭고 비판적 글쓰기“
  • 김재호
  • 승인 2021.06.16 0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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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비판』 이종철 지음 | 도서출판 수류화개 | 464쪽

공리공담에 빠지지 말고 사유에 현실성 부여
박제된 철학 벗어나려면 에세이 철학이 필요

“철학의 진정한 정신은 논증 이상으로 자유와 비판의 정신” 최근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를 출간한 이종철 한남대 초빙교수이자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지난 7일 <교수신문>과 서면 인터뷰에서 이같이 답했다. 현실과 유리된 강단 철학계의 문제를 지적하며 에세이 철학의 부활로 더욱 자유롭고 비판적인 글쓰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종철 저자는 “에세이 철학이 부활하고 학문적으로도 인정이 된다면 훨씬 더 철학자들의 사회 발언이 커질 수 있고, 서로 간에 논쟁과 소통도 많아질 수 있다”라며 “그만큼 철학이 대중과 만나고 그들의 인식과 교양을 끌어들이는 데 역할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에세이 철학은 철학을 단순히 이론이 아니라 철학함이라는 동사적 의미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고 밝혔다. 

철학, 현실이란 ‘파리통’ 벗어나게 해줘야

“철학 공부는 ‘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이란 말처럼 가지고 놀다 보니 배우는 방식이어야 한다” ‘완색이유득’은 사서 중 하나인 『중용』에 나오는 말이다.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꿈꾸는 『철학과 비판』이 출간됐다. 지난 7일, 저자인 이종철 한남대 초빙교수 및 연세대 인문학연구원을 서면 인터뷰했다. 그는 “단순히 화석화된 이론이 아니라 살아 있는 철학, 깨달음을 구하는 철학, 나아가서는 ‘파리통’ 속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철학”을 강조했다. 명사적 의미가 아니라 동사적 의미의 사유 활동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대화는 철학을 하는 구체적 방법이다. 

책의 제일 처음은 ‘사유와 방법’으로 다음의 네 가지를 제시한다. △기계를 만지듯 생각을 하라 △아이들처럼 생각하라 △놀이꾼처럼 생각하라 △장사꾼처럼 생각을 하라. 장사꾼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건 “공리공담에 빠지지 말라는 의미”로서 “사유에 현실성을 부여하자”는 뜻이다. 이 네 가지 사유 방식이 책 제목처럼 비판력과 이어질 수 있는지 물었다. 이 저자는 “사유의 방법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생각을 하고 텍스트를 분석하다 보면 그만큼 생각할 수 있는 힘과 비판의 힘도 길러지지 않을까 생각”한다면서 “철학사의 오랜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비판은 주체의 힘, 사유하는 자의 역량과 분리될 수 없다”고 답했다. 

이 저자는 책에서 “현실의 철학, 철학의 현실이라는 주제는 요원하다”(27쪽)라고 적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강단 철학계를 비판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학 안에서 서둘러 성과를 내야 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아닐까. 이에 대해 이 저자는 “철학이 전문화되고 내부적으로 분업화되고 기능화되다 보니 더욱 현실과 괴리되는 면이 적지 않다”라며 “동료 학자들의 좋은 논문이나 연구 성과물에 대해서도 인정하거나 인용도 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소개나 리뷰도 잘 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그 예로 서정혁 숙명여대 교수(헤겔철학 전공)가 번역한 『법철학(베를린 1821년)』(지식을만드는지식, 2020)을 제시했다. 이 책은 헤겔의 『법철학 강의』가 나온 지 200주년이 되는 해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동료 학자들의 정당한 평가가 단 한편도 없다는 지적이다.    

동료 학자들의 정당한 평가 필요

『철학과 비판』은 철학의 역할에 대해 상아탑에만 갇히지 말고, 실천적이고 타 분과나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개입하고 비판하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측면에서 철학의 개입이 가능한 것일까? 이 저자는 “전문화의 시대, 학술 논문의 인용 부호에 갇힌 채 박제된 철학은 점점 더 현실과 유리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라며 “지금 아카데미의 풍토에서는 다른 형태의 자유롭고 비판적인 글쓰기를 실험하기가 쉽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논문의 형식을 벗어나서 오래된 에세이 철학의 전통을 되살려 보자”라고 주장한다. 코로나19와 기술혁명으로 인한 전 세계적 빈부와 불평등, 포스트 휴먼의 도래 등에 대해 철학적 발언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책에선 ‘둘이 아니지만 하나도 아니다’를 언급했다. 32쪽을 보면 “우리 모두는 그런 점에서 지금 이 순간 이 땅에서 함께 공업(共業)을 쌓아나가고 있다고 할 것”이라고 적었다. 그 의미에 대해 “일원론과 이원론 모두를 아우르면서 넘어서는 화쟁(和諍)의 논리”라고 설명했다. 이 저자는 “남북이 갈라져 섬과 같은 나라에서 자칭 타칭 보혁 갈등, 계급 갈등, 지역 갈등,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등 수많은 갈등으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라며 “철학은 오래전 비트겐슈타인이 표현한 것처럼 ‘파리통 속의 파리’와 같은 이런 한국 사회의 형국에 탈출로를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철학의 비판적 시점에서 대학의 미래에 대해서 물었다. 이 저자는 “그동안 한국 대학은 사람에 투자하기보다는 캠퍼스나 건물과 같은 외형에 훨씬 더 많은 투자를 해왔다”라며 “우수한 학생들이나 우수한 교수들은 어떤 경우에도 남지만 건물이나 설비와 같은 외형은 오히려 유지하기조차 거추장스러워질 수도 있다”라고 답했다. 강사들의 처우나 교수 임용에서의 유학의 중요성 등을 꼬집은 것이다. 그는 “한국의 의사 배출시스템은 외국 유학에 의존하지 않고 의과대학 6년에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통한 엄격한 훈련으로 이뤄진다”라며 “좋은 교육과 철저한 훈련을 시킬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우수한 의사를 만들어낼 수 있는데, 이런 가능성을 대학의 다른 분야에 적용한다면 유학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국내에서 우수한 학자들을 양성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제언했다.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원대, 숙명여대, 서울여대 등에서 강의했고, 몽골 후레 정보통신대학 한국어과 교수와 한국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한남대 초빙교수와 연세대 인문학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브레이크 뉴스’ 논설위원과 NGO 환경단체인 ‘푸른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서문에서 밝히신 '일상과 양식'은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철학함을 위해서 기본적인 철학 공부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인간이 기본적으로 데카르트의 '양식(bon sense)'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철학 개념이나 철학사 등에 대한 교양 수준의 이해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이 든다. 

먼저 여러 가지 좋은 질문들을 가지고 교수신문과 이런 자리를 갖는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질문 하나하나가 묵직하고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오늘날 철학이란 말은 단일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굉장히 다의적인 용어지요. 전통적으로 철학은 지혜(sophist)에 대한 사랑(philos)이라고 하지만 무엇이 지혜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지로 들어가면 또 생각이 갈라지지요. 이 철학을 명사적 의미에서 이론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동사적 의미에서 사유의 활동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나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배우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선생들의 경우도 똑같이 직면하고 있지요. 칸트가 말하는 '철학함(philosophieren)'이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액션(Action)으로서의 철학이 지향하는 바는 분명하지요. 단순히 화석화된 이론이 아니라 살아 있는 철학, 깨달음을 구하는 철학, 나아가서는 '파리 통' 속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철학이지요. 하지만 막상 이를 구현하는 데는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철학 공부는 동사적으로 시작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철학은 그 시초에서부터 존재의 근원(arche)에 대한 호기심에서 물음을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이런 물음은 나중에 대화(dialogue)로 발전했지요. 철학이 많은 경우 어렵고 딱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학사나 특정 철학자의 쉽지 않은 개념과 그 개념틀을 배우려 하는 과정에서 부딪히지요. 물론 이런 이론으로서의 철학이 배경 지식이나 교양으로서 중요하기는 해도 선후가 필요할 듯합니다. 인간과 세계, 그리고 우주에 대한 갖가지 호기심을 풀어내는 물음과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수많은 대화에 익숙해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론으로서의 철학은 이런 물음을 구할 때 후속적으로 찾아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는 의미도 모르고 내용도 이해하지 못하는 숱한 철학의 이론들과 철학자들의 사상을 암기하듯 익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철학이 어렵고 지겹게 되는 근본 원인이지요. 

물음을 던지고 그 답을 구하기 위해 대화를 나누는 훈련이 어렸을 때부터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 점에서 동서양의 수많은 철학자의 이론들로 빼곡한 고등학교 철학 교과서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이론들을 암기식으로 외운다고 우리가 얼마나 철학자들의 철학이나 정신을 알 수가 있을까요? 이미 우리는 철학을 배우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꿰고 있는 것이지요. 그와 달리 저는 철학의 다양한 문제들 중심으로 - 이 가운데는 우리가 늘 접하는 일상도 포함되지요 - 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철학도 다른 공부와 마찬가지로 흥미와 관심 속에서 공부해야겠지요. 제가 늘 이야기하는 '가지고 놀다 보니 배운다(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은 여기서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이론으로서의 철학은 이런 물음들이 발전하면서 배워나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봅니다. 때문에 학습 방식과 커리큘럼등의 획기적인 조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사유와 방법'에 대한 네 가지 조언이 와닿는다. '기계를 만지듯 생각을 하라', '아이들처럼 생각하라', '놀이꾼처럼 생각하라', '장사꾼처럼 생각을 하라'. 여전히 객관식 시험에 익숙히 학생들이나 어른에게 유용한 팁인 것 같다. 이러한 사유의 방법에서 '비판력'이 길러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제가 네 가지 사유와 방법을 이야기한 까닭이 있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말도 있지만 막상 생각하라고 하면 어떻게 할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지요. 이런 생각을 일상적으로 좀 더 쉽고 구체적으로 해보자는 의미에서 제시해본 것이지요. 기계를 만지고 작동 오류를 해결하는 일은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겪는 것을 말하지요. '아이들처럼 생각하라'는 철학이 늘 찾는 무전제와도 연관되지요. 전제를 상정하면 그 전제에 사로잡혀 더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점에서 과거의 전제나 조건보다는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아이들의 태도에서 배울 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놀이꾼처럼 생각하라'는 것도 생각을 즐겁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일은 부담이지만 놀이는 즐거움이지요. 즐겁게 일을 하다 보면 한결 일을 수월하게 해나갈 수 있는데, 생각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장사꾼처럼 생각을 하라'는 의미는 공리공담에 빠지지 말라는 의미도 있지요. 사유에 현실성을 부여하자는 의미지요. 어떤 이는 형이상학적 공리공론이 의미가 있다고 보기도 하지만, 저의 경우는 현실 철학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들이 곧바로 비판력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라고 물었는데, 나는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의 힘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선물이 아니지요. 철학사의 오랜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비판은 주체의 힘, 사유하는 자의 역량과 분리될 수 없지요. 이런 면에서 사유의 방법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생각을 하고 텍스트를 분석하다 보면 그만큼 생각할 수 있는 힘과 비판의 힘도 길러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비판은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듯,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갖는 것이지요. 이러한 용기는 주체의 역량과 관계가 있지요. 내가 열심히 사유의 운동을 하다 보면 사유의 힘이 생기고 이런 힘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주는 것이지요. 니체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비판의 힘을 낡은 체제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사자의 용기에서 찾았지요. 그런 면에서 비판력은 주체의 힘과 용기와 연관이 크다고 봅니다. 

△"실제로 많은 철학자가 세계에 대해 일반인의 평균적인 이해보다도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26쪽), "그만큼 현실의 철학, 철학의 현실이라는 주제는 요원하다."(27쪽) 강단 철학계가 분명 이론철학에 경도돼 있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책에서도 밝혔듯이 실천의 측면에서도 고민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문제는 대학 안에서 서둘러 성과를 내야 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아닐까 한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제가 너무 주제넘게 철학자의 세계 이해의 문제를 단순화한 오류도 있겠지만, 제가 『철학과 비판』에서 든 부엉이의 예처럼 남들은 다 알고 있지만 철학만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지요. 과거에 철학은 모든 학문의 제왕이었지만, 근대 이후로 많은 학문이 철학으로부터 분리되어 나갔지요. 근대는 일종의 종합 학문을 지향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비판과 극복의 시대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근대에 새로 등장한 여러 인문과학과 사회과학들이 이런 현상을 반영하고, 인간의 마음과 정신에 대한 연구조차 심리학에 내주고 말았지요. 근대의 생물학이나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런 현상을 더욱 가속화시켰지요. 이런 상태에서 철학은 더욱더 인식론과 형이상학 같은 분야에서 나름대로 전문성을 유지하다 보니 현실과 유리되는 측면이 없지 않을 겁니다. 

철학이 전문화되고 내부적으로 분업화되고 기능화되다 보니 더욱 현실과 괴리되는 면이 적지 않습니다. 철학회가 경향 각지로 수십 개가 되고, 철학 저널들이 그만큼 많아도 이제는 현실과 시대에 대해 발언하는 철학자나 철학 저널들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런 식으로 담을 쌓다 보니 동료 학자들의 좋은 논문이나 연구 성과물에 대해서도 인정하거나 인용도 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소개나 리뷰도 잘 하지 않습니다.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올해는 헤겔의 『법철학 강의』가 나온 지 200주년이 되는 해지요. 이 책이 근대 정치사상과 철학에 미친 영향력은 막대하지요. 그래서 관련 학회에서도 이 책을 가지고 200주년 기념 심포지움을 열기도 했습니다. 이 책이 작년(2020)에 숙명여대 서정혁 교수의 꼼꼼한 노력에 의해 재번역본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1년 동안 이 중요한 번역본에 대한 소개나 리뷰 한 편 없습니다. 관련 전문 학자들의 정당한 평가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 정도로 서로 간에 소개와 소통이 없다면 결국은 전문 철학자들의 작업이라는 것이 두더지가 자기 구멍만 파는 형국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철학자들의 전문적 작업이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이유 중의 하나겠지요.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요? 첫째로 여전히 한국의 학자들은 학문의 사대 근성과 식민지 근성을 벗어나 있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책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오퍼상과 고물상이 아닌가라는 자조가 한국의 학자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내려 있습니다. 둘째로, 대학의 단기적인 업적 평가가 외형적인 과시에 치중하다 보니 국내학자들의 논문 인용이나 국내 저작에 대한 참조가 부족하지요. 여전히 번역본 보다는 원전, 국내 논문 보다는 외국 논문을 인용하는 보여주기 식이 큽니다. 셋째, 거듭 강조하는 바지만 지금처럼 논문 외의 글쓰기가 힘든 상황에서는 학자들 상호 간에 연구 업적들을 소개하고 평가하기가 힘들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의 역할에 대해서 상아탑에만 갇히지 말고, 실천적이고 타 분과나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개입하고 비판하라는 메시지로 이번 책이 읽힌다. 철학이 개입한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측면에서 가능한 것일까? 예를 들어, 코로나19가 창궐해 단절과 소외의 문제가 불거지는데, 이에 대한 새로운 인간 존재론이나 사회철학적으로 계급 갈등 극복 등을 담론화하는 것인가.

이 물음은 앞의 물음과도 연관이 있겠군요. 철학은 다른 학문 이상으로 현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고대에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의 역사가 말해준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헤겔은 철학을 '사유 속에 포착한 그 시대'라고도 규정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전문화의 시대, 학술 논문의 인용 부호에 갇힌 채 박제된 철학은 점점 더 현실과 유리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제가 에세이 철학을 주창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논문을 쓰고 연구서를 내는 것은 학자로서 당연한 의무입니다. 하지만 지금 아카데미의 풍토에서는 다른 형태의 자유롭고 비판적인 글쓰기를 실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업적 평가나 승진 평가에서 절대적으로 A4 10 장 짜리 논문 위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스템에 대한 반성과 대안적인 형태도 모색해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말하는 것은 논문의 형식을 벗어나서 오래된 에세이 철학의 전통을 되살려 보자는 것이지요. 철학의 진정한 정신은 논증 이상으로 자유와 비판의 정신이지요. 에세이 철학이 부활하고 학문적으로도 인정이 된다면 훨씬 더 철학자들의 사회 발언이 커질 수 있고, 서로 간에 논쟁과 소통도 많아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만큼 철학이 대중과 만나고 그들의 인식과 교양을 끌어들이는 데 역할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에세이 철학은 제가 앞서 말했듯 철학을 단순히 이론이 아니라 철학함이라는 동사적 의미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계기이기도 하지요. 

지난 1년 반 동안 인류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만나면서 심각한 생존 테스트를 겪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1억 5천만 명 이상이 이 바이러스로 고통을 겪었고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있기는 해도 여전히 인도와 남미, 동남아시아에서는 맹위를 떨치고 있고, 새로운 변이바이러스가 등장하면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인류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삶에서 커다란 변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 코로나는 바이러스의 문제 이상으로 빈부와 불평등의 문제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과 환경의 관계에서 발생한 문제가 인간과 인간들끼리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게다가 비대면이 일상화된 삶의 양식은 4차 산업 혁명의 기술 발전과 함께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가속화시키고 있습니다. 기술 혁명에서도 불평등의 문제가 심각하게 다가오고 있지요. 인공지능과 빅데이타, 로봇공학과 생명 공학의 결합, 사이보그 등으로 이어지는 기술 혁명은 포스트 휴먼(Post Human)의 문제 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이런 현실과 현상을 대하면서 문제를 이해하고 설명하고 해결하기 위해 주변 학문들과 협력하고, 다양한 채널을 통해 현실 문제에 대해 발언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난 세기를 통해서 볼 때 럿셀이나 사르트르, 프랑스의 6.8 세대 철학자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자들의 전통이 있고, 한국에서도 사회 현실을 철학 속에 담으려고 노력하는 철학자들과 철학 단체들이 있습니다. 

△'둘이 아니지만 하나도 아니다'를 잘 읽었다. 칸트가 제시한 두 세계가 이해된다. "우리 모두는 그런 점에서 지금 이 순간 이 땅에서 함께 공업을 쌓아나가고 있다고 할 것이다."(32쪽) '공업(共業)'과 섭섭해하지 말자는 게 좋다. 그럼에도 대중들은 종종 흑백논리나 양비론, 환원주의나 일원론 등에 매몰되는 듯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불이(不二), 즉 '둘이 아니다'는 성(聖)과 속(俗), 부처와 중생, 깨달음과 무명이 다르지 않다는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서양철학식으로 이야기하면 온갖 형태의 이원론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지요. 기독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천국은 사후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 건설할 나라라는 의미지요. 이런 의미에서 지상의 나라와 천상의 나라, 현상과 이데아를 구분하는 두 세계론을 거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반면 ‘하나도 아니다’라고 하는 불일(不一)은 그 둘을 단순히 하나로 동일시하는 것도 아니지요. 예를 들어 성과 속을 동일시하면 탁한 속을 개선하고 비판할 수 있는 성의 세계를 잃어버릴 수가 있지요. 플라톤이 말하는 현상과 이데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는 어쩔 수 없이 한정되어 있는 세계이고 불완전한 세계이지요. 불일(不一)은 정태적 일원론과 현상 고착에 빠지지 않도록 해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세계를 비판하고 이 세계를 초월해서 지향할 수 있는 보편의 세계는 논리적으로도 필요하지요. 다만 불이(不二)의 정신은 플라톤처럼 그 세계를 다른 세계에 두지 않습니다. 그 점에서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라는 것은 일원론과 이원론 모두를 아우르면서 넘어서는 화쟁(和諍)의 논리라고도 할 수가 있지요. 그것은 하나도 치고 둘도 치고, 하나와 둘 모두를 끌어안습니다. 그것은 논리를 넘어선 역설이고 살아있는 삶의 통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설에 기대서 끊임없이 현재를 상대화하고, 두 세계로의 초월을 다시 넘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의 한국 사회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거나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의 극단적인 자기중심주의와 확증편향, 내로남불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프레임 정치가 만연하고, 진영 논리로 양극화되면 내부 갈등이 극심한 상태입니다. 이런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한국사회의 미래를 낙관하기 힘듭니다. 남북이 갈라져 섬과 같은 나라에서 자칭 타칭 보혁 갈등, 계급 갈등, 지역 갈등,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등 수많은 갈등으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습니다. 이런 내부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랫동안 단절되어 있던 남북 간의 통일을 어떻게 말할 수 있고, 통일 이후의 한국에 대한 어떤 비젼을 가질 수 있을까요? 철학은 오래전 비트겐슈타인이 표현한 것처럼 '파리통 속의 파리'와 같은 이런 한국 사회의 형국에 탈출로를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극단화된 갈등의 양 논리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논리가 필요하지요. 그 점에서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는 대승불교 정신의 의미를 우리가 되묻고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46쪽을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정확한 기억은 미래의 창조적 활동을 제한하고, 단순히 과거의 행동을 반복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인간은 애매하고 모호한 정보로 이루어진 기억을 바탕으로 창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학의 역할은 어떻게 간주해야 할까? 과거의 경험으로부터도 교훈을 얻지 않는가? 책에서 "그 아픈 고통의 기억을 외면하려 하지만 늘 그 언저리를 배회하는 것이다. 이런 반복강박은 우리를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대면하려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59쪽)라고 적기도 했다. 

이 문제는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기억과 관련해서는 제한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정확한 기억은 미래의 창조적 활동을 제한하고, 단순히 과거의 행동을 반복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라고 했을 때는 결정된 과거가 지나치게 미래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 때문이지요. 이러한 의미를 철학 텍스트로 확장한다면 '텍스트는 해석이다. 텍스트의 주인은 없다'는 의미에서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을 수 있을 겁니다. 사실이 지나치게 정확하다면 이런 해석의 여지가 제한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기억과 기록이 정확하다면 과거를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제가 말한 기억의 의미는 여기까지입니다. 

질문하신 것처럼 역사학은 정확한 기록을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고 이 과거로부터 이른바 역사적 교훈을 얻으려는 학문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의 경우에도 해석의 여지는 많이 있습니다. 유적이나 유물, 고고학적 문서들 모두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속하기 때문에 현재의 사실과는 다릅니다. 현재의 사실도 상황과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사실에 대한 해석의 여지는 많이 열려 있다고 봅니다. 
과거의 기억이 공동체를 유지하고 복원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2천 년이 넘도록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디아스포라(diaspora)를 경험한

유대인들의 경우지요. 그들은 매년 애굽에서 탈출하던 때의 유월절 제식을 지내면서 자신들의 오랜 공동체의 경험을 후손들에게 일깨워주면서 그 기억을 후손들에게 전달해 줍니다. 이런 공동체의 기억 보존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그들의 나라를 되살릴 수가 있었지요.

프로이트의 반복강박은 트라우마의 상처가 현재의 발목을 잡을 수 있음을 보여주지요. 그로 인해 늘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인격뿐만 아니라 공동체들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갈등이 그렇지요.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가해자 일본이 자신들의 과오를 대면하고 사과하는 용기를 발휘하지 못하다 보니 한일간의 역사는 수십 년 전의 상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지요. 

△'III 글쓰기와 인문학'도 잘 읽었다. 그런데 최근 자신의 생각이 담긴 글이 아님에도 공저자로 이름을 넣거나 자식의 이름을 넣거나 표절을 해서 학위를 박탈당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무래도 외형적 과시, 과도한 스펙을 요구하는 풍토가 첫 번째 원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대학 입시 경쟁뿐만 아니라 대학 과정 그리고 학자들의 연구에서도 끊임없는 경쟁을 요구합니다. 어느 분야든 경쟁은 필요하겠지만 지금과 같은 무한경쟁 시스템은 생존에 대한 위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경쟁에서 탈락하는 순간이 그렇지요. 그래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려다 보니 표절과 같은 불법적 수단이나 아빠 챈스 혹은 무임승차와 같은 논문 공저자 끼워 넣기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표절은 어떤 경우든 정당화될 수 없고, 현재 학계에서도 이를 걸러내는 시스템이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질보다는 양, 실질적 내용보다는 외형적 스펙에 치중하는 무한경쟁 시스템의 변화도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시스템은 생존에 더 많은 압박을 가하면서 동력을 소진시킬 뿐 진정한 의미에서 창의력을 이끌어 내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책에서 "에세이 철학이란 과거 몽테뉴나 파스칼, 마르크스나 니체, 벤야민이나 아도르노의 에세이들처럼 그리고 한국의 류영모나 함석헌의 살아있는 글들처럼 철학 논문의 형식을 빌리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삶과 현실 그리고 시대와 역사의 문제들에 대해 순수한 의미의 정신적 통찰을 보여줄 수 있는 글들을 말한다."라고 정의했다. 이번 책은 정말 다양한 분야에 대한 철학적 고민과 사유가 눈에 띈다. 그런데 한 꼭지씩 읽을 때는 정말 좋으나, '철학과 비판'이라는 책 제목에서 기대되는 것처럼, 책에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주제나 깊이성은 좀 아쉬운 면이 있다. 

어떤 책이든 그 책에 대한 평가는 갈릴 수가 있을 겁니다. 또 좋은 평가와 나쁜 평가가 공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분야에 대한 철학적 고민과 사유가 눈에 띈다고 해준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나 깊이성 면에서 아쉽다고 한 평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이 책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쓴 연구서가 아닙니다. 이 책은 자유로운 에세이 철학의 정신에 기초해 다양한 지적 모험과 실험을 시도한 책입니다. 오래전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쓴 『관념의 모험(Adventures of Ideas)』이 지시하는 것처럼, 저는 이런 주제들을 일상 속에서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깊이와 관련해서도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평면은 나열이지만 깊이는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이 적지 않다 보니 단순히 나열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깊이는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첫째로 이 책은 전문 연구서가 아닙니다. 그 점에서 좀 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없다 보니 깊이가 없다고 생각할지모르지만 그것은 제 책이 의도한 바는 아닙니다. 둘째로 저는 제 책에서 다른 철학자나 사상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 사고를 통해 주제에 대한 저의 분석과 인식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책들과 다르게 이 책의 고유한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찰이라는 점에서 저는 정중하게 질문자의 깊이에 대한 의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현재 한남대 초빙교수와 연세대 인문학연구원에 계시는 걸로 알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대학의 미래에 대해서 많은 걱정(학령 인구 감소 등)과 변화에 대한 모색(연구 중심 대학으로의 전환 등)이 일고 있다. 대학의 미래나 역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의 대학은 지금 총체적 위기 상태에 있다고 봅니다. 인구 절벽 현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되었고, 현재 학생 수가 급감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지방의 거점 대학조차 정원 유지가 쉽지 않다고 하는데 앞으로 전국적 현상이 될 겁니다. 그동안 한국 대학은 사람에 투자하기보다는 캠퍼스나 건물과 같은 외형에 훨씬 더 많은 투자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대 펜더믹을 경험하면서 그런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는 위험을 알게 됐습니다. 우수한 학생들이나 우수한 교수들은 어떤 경우에도 남지만 건물이나 설비와 같은 외형은 오히려 유지하기조차 거추장스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한국의 대학은 아직도 최종 학위를 생산하는 데 역부족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방의 수많은 대학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수도권 명문 대학들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여전히 유학을 가야 하고, 신규 교수 임용에서도 유학파들이 절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매년 노벨상에 목을 매달고 있으면서도 기초 연구자들은 너무나 홀대를 받고 있습니다. 교직원들의 처우에 비해 너무나 열악한 강사들의 처우는 강사법 이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강사들의 일자리만 줄이고 말았습니다. 학문 후속 세대들에 대한 이런 박대는 한국의 대학이 미래에 우수한 연구자들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원인이 많은 대학의 생존을 어렵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는 말도 있습니다. 제가 이 부분에 대해 말할 위치는 아니지만 미래 대학의 개혁을 위해서는 대학의 구성 주체들뿐만 아니라 대학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교육부, 그리고 한 나라의 교육과 연구 전반에 걸친 문화까지도 반성하면서 개혁해 나갈 수 있는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이 미래에도 여전히 중요한 지적 생산지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대학은 한국의 기업들이 세계 무대에서 경쟁을 하듯, K-Pop을 위시한 한류의 문화들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듯, 세계의 대학들과 경쟁을 하면서 한국 대학의 고유한 지적 생산물들을 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코로나와 싸우는 과정에서 한국의 우수한 방역 및 의료 시스템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의사 배출시스템은 외국 유학에 의존하지 않고 의과대학 6년에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통한 엄격한 훈련으로 이루어집니다. 말하자면 좋은 교육과 철저한 훈련을 시킬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우수한 의사를 만들어낼 수 있는데, 이런 가능성을 대학의 다른 분야에 적용한다면 유학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국내에서 우수한 학자들을 양성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것을 하느냐 못하느냐와는 별개로 한국의 대학들이 양적 팽창에만 신경 쓸게 아니라 이런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긴 글 읽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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