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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개인! 스토파드에 빠지다
역사와 개인! 스토파드에 빠지다
  • 권혜경 동서대 영어학과 교수
  • 승인 2021.06.10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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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경 (동서대 영어학과 교수)
권혜경 (동서대 영어학과 교수)

지난 십여 년간 내 연구의 화두는 영국의 극작가 톰 스토파드(Tom Stoppard 1937-)였다. 체코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재혼으로 영국에 이주한 스토파드는 언론사 기자를 거쳐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라는 희곡으로 혜성처럼 영국 극단에 등장하였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등장하는 부수적인 두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거장의 작품을 해체하는 이 작품으로 스토파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극작 초창기 스토파드는 정치나 사회 문제에 항상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70년대 후반 소련과 동유럽의 인권 문제를 인식한 후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국제인권사면위원회를 통해 소련 반체제 인사들을 만났으며, 체코 반체제 인사들의 '77 헌장'(Charter 77) 선언 역시 그가 동구권 현실에 직접 개입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필자가 스토파드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은 『록큰롤』(2006)이라는 후기작품을 접하고부터였다. 영국의 케임브리지와 체코의 프라하 두 장소를 배경으로 1960년대 이른바 ‘프라하의 봄’ 이후 80년대 후반 ‘벨벳 혁명’에 이르기까지 20여년 간의 체코 민주화 운동을 다루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체코의 민주화 과정이 ‘더 플라스틱 피플 오브 더 유니버스’라는 록그룹에 대한 체코 공산 정부의 탄압에 맞서 반체제 인사들이 결집함으로써 촉발되었다는 사실이다. 

스토파드는 서구 록큰롤 음악을 좋아해 LP 음반을 사 모으며 정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주인공 얀이 전체주의적인 국가의 통제 속에서 서서히 체코의 반체제 인사로 변모하는 과정을 극의 주된 줄거리로 설정하고 있다. 록큰롤과 혁명의 신선한 조합이라니! 나아가 스토파드는 장면 전환 시마다 60년대 말 이후 8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상징적인 록 음악들, 즉 핑크 플로이드, 롤링 스톤즈, 도어즈, 벨벳 언더그라운드 등의 음악을 배치함으로써 작품의 내용과 극적 형식 모두에 록큰롤이라는 요소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었다.

『록큰롤』에 매혹되었던 필자는 점차 역사와 사회,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그의 중·후기작으로 연구를 이어나갔다. 가장 최근에 연구를 마친 작품은 『유토피아 해안』 (The Coast of Utopia, 2002)으로 항해, 난파, 구조로 구성된 삼부작이다. 스토파드는 1833년부터 1868년까지 러시아와 프랑스, 영국, 스위스 등을 배경으로, 19세기 제정 러시아의 지식인들인 인텔리겐치아들이 고질적인 차르 체제의 전복과 농노 해방을 주장하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대서사시로 풀어내고 있다. 그 중심에는 러시아 최초의 사회주의자 알렉산드르 게르첸,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 소설가 이반 투르게네프, 문학비평가 비사리온 벨린스키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영미문학을 전공한 필자로서는 『유토피아 해안』 삼부작의 내용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투르게네프의 소설은 읽어본 적이 있지만 다른 사상가들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였기 때문이다. 스토파드의 삼부작을 연구하는 동안 게르첸이나 바쿠닌, 벨린스키의 전기나 사상적 관점을 찾아 공부하기에 급급했다. 스토파드는 20세기 초 발생한 공산혁명과 이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형성이라는 역사의 큰 그림에 가려져 러시아는 물론 유럽에서도 잊혔던 19세기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들을 연극 무대에 소환함으로써 ‘유토피아’와 진정한 개혁의 의미에 대해 다시 묻고 있다. 방대한 사회상을 담으면서도 스토파드의 작품은 여전히 연극적 미학과 주제적 깊이를 놓치지 않고 있다. 힘든 연구 과정이었지만 그의 작품은 힘듦을 잊게 했다.

최근 『유토피아 해안』 삼부작을 연구한 논문으로 모 학회로부터 학술상을 받았다. 전혀 예상치 못하였던 ‘선물’이었다. 끙끙대며 관련 서적들을 읽고 분석해서 논문으로 작성하였던 쉽지 않은 과정들이 보상받는 것 같았다. 『유토피아 해안』 삼부작은 아직 국내에서 공연되지 않았다. 마음속 깊이 작품 번역이라는 새로운 욕심이 슬슬 똬리를 트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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