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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逆'의 횃불 든 전도사들...비전공자일 경우도 많아
'反逆'의 횃불 든 전도사들...비전공자일 경우도 많아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4.11.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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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담번역의 세계

▲전담번역은 때로 번역가의 한 생애를 건 저자와의 길고 지루한 대화다. 하지만 그런 내밀한 교감 속에서 진실한 번역의 언어가 탄생한다. 번역의 세계에서 길을 잃어버린 채 나오지 못하는 이들의 면면을 엿본다. ©
전담번역자는 한 저자의 책을 도맡다시피 해서 번역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알베르 까뮈 하면 김화영 교수, 베르나르 베르베르 하면 이세욱 씨 등이 떠오르듯, 전담번역이라는 키워드로 번역서의 세계를 엿볼 경우 우리는 번역문화에 깃든 어떤 새로운 풍경과 열정을 만나게 된다. 학술서의 경우 전공자가 전담번역자가 돼야 마땅하지만, 우리의 경우 비전공자가 순수하게 저자에 매혹돼 전담번역자로 깃발을 꽂을 경우도 많다. 학술서와 대중교양서로 나눠 전담번역자들의 면면과 특징, 해외사례 등을 살펴봤다. / 편집자주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프랑스인들이 접할 수 있었던 건 시인 보들레르 때문이었다. 파리에 가 온갖 정보를 수집해 번역할 정도로 그는 포에게 심취해 있었다. 앙드레 지드 역시 번역에 정력을 쏟았다. 세익스피어, 괴테, 타고르를 프랑스에 소개했던 게 그였다. 한국에선 ‘알베르 카뮈’ 하면 김화영 고려대 교수를 떠올릴 것이다. 카뮈 전집을 번역했는데, 정확한 미문으로 사랑받아왔다. 미셸 투르니에의 아름다운 지중해 문학을 접할 수 있는 것도 그의 덕이다. 이처럼 한 저자의 저서들을 꾸준히 번역하는 이른바 ‘전담번역’이 국내에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전담번역가가 된 사연들


서양철학전공자들 중 ‘전담번역가’의 길을 걷는 이들이 꽤 된다. 이기상 한국외대 교수(철학)는 하이데거 담당번역자로 꼽힌다. 1987년 ‘실존철학’을 첫 역서로 내놓은 후,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현상학의 근본문제들’에 이르기까지 10여권을 우리말로 옮겼다. “기존 번역들이 일본어판을 옮겨 왜곡이 심하다”라는 게 번역착수의 이유였다. 하이데거는 독일 일상용어로 ‘개념놀이’를 잘하는데, 이것을 일본식 한자로 맞바꾸면 하이데거는 반토막이 돼버린다.


이 교수는 하이데거의 핵심용어인 ‘Dasein’을 ‘현존재’가 아닌 ‘거기-있음’으로 옮겼다. 또 ‘본질-존재’는 ‘무엇-임’ 혹은 ‘무엇으로-있음’으로 바꿨다. 학부 때부터 독일에서 공부했기에 그는 독일어 뉘앙스를 살리는 데 좀더 정확할 수 있었다. 


에드문트 후설의 책 역시 까다롭긴 마찬가지다. 후설 전담번역자는 이종훈 춘천교대 교수(철학). 이 교수는 순수 국내파이어서 그런지 더욱 원전에 충실한 공부를 해왔다. 그런데 해외유학파들이 국내에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을 겉핥기식이나 2차 문헌에 의지해 소개하는 걸 보고, 번역을 결심하게 됐다. ‘현상학의 이념,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에서 시작해 ‘시간의식’, ‘경험과 판단’, ‘데카르트적 성찰’까지 이어졌다. 지금은 ‘형식논리와 선험논리’ 등 두 권을 번역중이다. 하지만 그의 독주가 두드러지는 후설번역의 뒤를 누가 이어갈진 미지수다.


현대성의 명석한 해석자 장 보드리야르를 알린 건 배영달 경성대 교수(불문학)다. 1994년 ‘생산의 거울’을 내놓은 이래, ‘세계의 폭력’, ‘지옥의 힘’, ‘건축과 철학’, ‘테러리즘의 정신’ 등 보드리야르 후기 저서를 여러 권 소개했다. 보드리야르와 첫 인연을 맺은 건 출판사 의뢰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이후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배 교수는 “그의 급진적 사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라며 앞으로도 ‘Cool memories’ 시리즈 등을 번역할 것이라 한다. 


한편, 한나 아렌트의 전담번역자는 둘이다. 홍원표 한국외대 교수(정치철학), 김선욱 숭실대 교수(윤리학)가 아렌트 연구자면서 번역자다. 홍원표 교수가 ‘정신의 삶 1’과 ‘혁명론’을, 김선욱 박사가 ‘칸트정치철학강의’를 각각 옮겼다. 두 사람은 현재 아렌트 전기와 저서를 번역중에 있다. 두 사람의 번역은 차이가 좀 있다. 예컨대 ‘공공영역’, ‘공론장’ 등 핵심단어가 달리 번역된다. “중요한 건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홍원표 교수는 말한다. 어쨌든 역설과 반어법들이 많고, 또 서양철학 전반을 다루는 난해한 아렌트 사상의 전담번역자로 훗날 누가 꼽힐지는 두고 볼 일이다.

최근 빛보는 동양사상과 과학서


동양사상 쪽 번역도 활발하다. 가라타니 고진, 마루야마 마사오 등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일본사상가들. 김석근 연세대 교수(정치사상)는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충성과 반역’, ‘일본의 사상’ 등 마루야마의 책만 다섯 권 소개했다. 첫 번역을 시작한 1995년 당시는 국내 동양사상 연구기반이 매우 약했다. 그렇지만 김 교수가 마사오 책을 보니 연구방법론이나 시각 등 배울 것들이 꽤 있어 시작했다. “일본어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하고, 또 문헌들이 많이 나와 번역이 만만찮았다”라고 털어놓는데, 영역본을 참조하면서 그런 어려움을 해결했다고 한다. 곧 마사오의 ‘문명론의 개략을 읽다’도 내놓을 예정이다.


물리학 쪽에선 리처드 파인만의 책을 박병철 대진대 교수(물리학)가 열심히 번역중이다.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1’, ‘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이야기’ 등이 그것으로 대우재단번역지원을 받은 게 계속 인연이 됐다. 그가 번역하면서 중점을 둔 건 두 가지다. 첫째, 파이만 책들은 강의를 옮겨놓은 것이라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구어체로 전달했다. 둘째, 파인만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다른 논의들로 점프하곤 하는데, 이런 부분엔 박 교수가 ‘슬쩍슬쩍’ 보충설명을 끼워 넣었다.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공자도 아닌데 전담번역?


전공자가 아닌데도, ‘어쩔 수 없는’ 사연으로 전담번역자가 된 경우도 있다.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는 번역이 나왔다”라는 홍윤기 동국대 교수의 평을 받은 에른스트 블로흐 전집의 번역자 박설호 한신대 교수(독문학)가 그런 케이스. 마르크스주의적 비판과 메시아적 희망을 연결시킨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 5권을 10여년에 걸쳐 번역해 내놓은 건 ‘대단한’ 일이었다. 번역을 시작했던 건 ‘유토피아 문제’로 학위논문을 쓰던 중 유토피아사상의 ‘권위자’인 블로흐에 매력을 느껴서다. 1990년대 초에 착수해 올해에야 빛을 보게 됐는데 “하나하나 공부하면서 번역했다. 하루 9시간 투자해 고작 1페이지밖에 못 옮긴다”라고 비전공자로서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국내에 블로흐 전공자가 없고, 번역에 선뜻 나서지 않는다. 아직도 블로흐의 주저인 ‘주체와 객체’는 번역이 안됐는데, 박 교수는 “전공자가 좀 해줬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이런 사례는 우리 번역문화의 우울한 현주소다. 예컨대 자끄 라깡의 책도 영문학자에 의해 소개되기 시작했던 게 우리 현실이다. 배영달 교수는 “어문학자들이 철학서를 번역하는 게 특히 안타깝다”라고 지적한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대중교양서 전담번역의 풍경

직접 쓰는 기분으로…

학술서에 비해서 대중서들은 번역자가 누구인지 큰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렇지만 문학이나 인문학적 에세이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해외 저자의 문체와 삶을 잘 이해하는 전담번역가가 그 사람을 화젯거리로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작가의 매력에 빠져서 그 사람을 속속들이 소개하고 싶어하는 전담번역가들이 국내에도 꽤 여럿 있다.


소설 ‘개미’를 비롯해 ‘나무’, ‘뇌’ 등으로 국내 독자들을 사로잡았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들은 모두 이세욱 씨가 번역했다. 우연히 베르베르의 책을 접하게 됐던 그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문학이며 문학시장과 문학에 대한 사유를 넓히는 데 많이 기여할 것”이란 생각에 출판사를 의뢰해서 번역을 시작했다. 첫 번역 때부터 그는 베르베르를 만나러 갈 정도로 열성적이었고, 책에 나오는 거리, 무대, 인물 등 작가가 느끼는 것은 모두 느끼기 위해 여행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읽었다. “마치 내가 쓴다는 기분으로” 그는 베르베르가 되어 번역하는 데 몰두해 한 권도 빠지지 않고 모조리 소개했다. 지금은 올 10월 출간된 ‘우리는 신’이란 3부작 번역에 착수했으며, 앞으로 3년간 이 작업을 할 예정이다. ‘하와이의 자식들’ 등 베르베르의 만화도 소설로 개작되고 있는데, 물론 이것도 이세욱 씨 몫이다.


시오노 나나미 만큼 관심을 모은 여류문필가도 없다. ‘로마인 이야기’를 위시해 수십권이 번역돼 나왔는데, 시오노 나나미의 전담번역가는 세 명이다. 한길사에서 먼저 시오노 나나미를 발굴했고, 이를 故 정도영 씨, 김석희 씨, 오정환 씨 세 번역가에게 맡긴 것. 정 씨는 ‘바다도시 이야기’를, 김 씨는 ‘로마인 이야기’를, 오 씨는 ‘나의 친구마키아벨리’ 등을 각각 맡게 됐다. 세 번역가 모두 시오노 나나미에게 완전히 매료됐다. 김 씨와 오 씨는 모두 “너무나 탁월한 작가다”라고 입을 모으면서,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계속해서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번역할 것이라 말한다. 김씨는 여태껏 ‘로마인 이야기’ 12권을 번역했는데, 향후 3년간은 나머지 3권 번역에 몰두할 것이라고 한다.


독일문학의 거장 슈테판 츠바이크도 많은 번역가들을 거느리지만 특히 안인희 씨를 첫손에 꼽을 만하다. 안 씨는 1995년 독일유학에서 우연히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집어 들었는데 지식인들의 광기어린 내면을 너무나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는 이 탁월한 복음술사에게 반해버렸다. “이미 여러권의 책을 번역해봤지만, 이 책을 옮기면서 처음으로 번역의 독특한 즐거움을 느꼈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베토벤의 전기를 쓴 로맹 롤랑의 전기를 쓴 츠바이크”는 매력덩어리였다. 그에게 숨가쁘게 말려들어간 안 씨는 그 외에도 ‘스코틀랜드의 여왕’,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등을 번역했다.


이것 말고도 모리스 르블랑 등 프랑스 추리 소설 분야에서 성귀수 씨가 전담번역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으며, 요시모토 바나나는 일본문학의 전문번역가로 명성을 굳힌 김난주 씨가 10여권을 독점하다시피 번역하고 있다. 무라카미 류는 양억관 씨가 주로 번역했는데, 김난주와 양억관은 일본문학을 맛깔스럽게 옮기는 양대 번역자로 명성을 누린다. 스페인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가 마르케스를 비롯해 주요 작가들을 번역해온 송병선 울산대 교수는 작가들을 현지에서 작가들을 만나서 교유하고 수시로 메일을 주고받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전담번역가로 충분한 조명이 필요한 번역자다. 최근 돌풍을 일으킨 파울로 코엘료의 책은 불어 전문 번역가인 이상해 씨가 주목을 끈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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