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2:30 (금)
"철저한 자기상실이 서양정신에 없는 우리의 미덕"
"철저한 자기상실이 서양정신에 없는 우리의 미덕"
  • 김상봉 문예아카데미
  • 승인 2004.10.3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반론_ 장은주 교수의 세번째 글(교수신문 332호)에 답한다

하이데거는 서양형이상학의 역사를 가리켜 존재망각의 역사라 불렀다. 아무런 원한감정 없이. 니체는 기독교를 가리켜 노예도덕이라 비판했다. 그의 말투로 미루어보건대 아마도 그에겐 기독교에 대한 약간의 원한감정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또 어떠한가. 그는 인간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 불렀다. 그리고 거기엔 모든 지배계급에 대한 원한감정이 숨길 수 없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원한감정 없이 말했다 해서 그의 말이 더 옳은 말이 되는 것도 아니고 마르크스가 원한감정에 가득 차서 부르주아 사회를 비판했다 해서 그의 말이 그른 말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어떤 감정을 가지고 말했느냐가 아니라 그의 말이 옳으냐 그르냐일 뿐이다.

내가 서양정신의 역사를 나르시시즘의 역사라 말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이데거가 서양철학의 역사를 존재망각의 역사라고 비판했다 해서 서양철학의 역사를 “결정론적으로” 단죄하거나 매도한 것이 아니었듯이, 내가 서양철학의 나르시시즘을 비판한다 해서 마찬가지로 서양정신이 무슨 구제불능의 악한 정신이라고 매도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장은주 교수의 염려는 과도하고 부적절하다. 존재망각의 역사라는 비판을 통해 하이데거가 서양철학을 폐기처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감추어진 측면을 새로이 드러내고 서양철학에 대한 논의의 지평을 확대했던 것처럼, 나 역시 서양정신의 나르시시즘이라는 비판을 통해 서양정신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고 서양철학에 대해 새로운 논의의 지평을 개방하려 했을 뿐이다.

새로움은 언제나 낡은 것의 비판을 통해 도래한다. 장 교수처럼 서양정신을 숭배하는 사람에게는 서양철학에 대한 모든 비판은 비판이라는 이유만으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겠지만, 나는 서양철학에 대해 끝없는 경탄을 느끼는 순간에조차도 결코 그것을 신성시하거나 절대화한 적이 없다. 모든 인간적인 것은 유한하고, 비판될 수 있다. 이는 서양철학이 내게 아무리 아름답게 보인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는 이런 비판정신이야말로 모화사상에 찌든 우리가 서양정신에게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자유로운 정신의 태도라고 믿는다.

나는 ‘나르시스의 꿈’에서 한 번도 서양철학의 유산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나는 장 교수가 말하듯이 내 책에서 “비천한 자만이 착한자다”라고 말한 적도 없고 그런 뜻을 비친 적도 없다. 그 책 제1부의 제목은 ‘서양정신의 아름다움과 숭고’였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내가 얼마나 서양정신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으며 또 서양정신의 숭고에 얼마나 깊이 감동받는지를 있는 그대로 고백했다. 그리고 서양정신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실체가 자유의 이념이라는 것 역시 분명히 밝혔다. 그러니까 서양적 주체성과 자유의 이념을 비판하기 전에 나는 당연히 서양적 주체성과 자유의 이념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서로주체성 역시 하나의 주체성이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서양적 자유와 주체성의 이념에 빚지고 있으며 그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서로주체성은 주체성이되 다른 주체성이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서양정신이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 주체성 또는 다른 자유의 이념을 표방한다.

나는 지금 우리에게 다른 자유, 다른 주체성의 모색이 불가피한 까닭을, 서양적 자유의 이념이 본질적으로 자족성에 기초하고 있는 까닭에 타자와의 만남을 근본적으로는 거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나의 이런 핵심적 주장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타자와의 만남에 서툰 것은 서양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세상에 우리처럼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 폐쇄적이고 적대적인 민족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 점에서 한국사회의 자기중심적이고 폭력적인 동일성의 문화를 마음속 깊이 혐오하고 경멸한다. 그에 비하면 서양사회는 이미 그리스 시대에서부터 훨씬 더 다원적이고 타자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서양정신이 예나 지금이나 다른 어떤 정신보다 선진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장 교수가 언급한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9·11테러에 관한 공동의 철학적 기획 역시 서양정신이 보여줄 수 있는 충정의 발로라는 것 역시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모든 충정에도 불구하고 두 철학자의 공동기획에서 서양정신의 미덕을 보는 만큼 또한 한계를 본다. 데리다는 미국과 이슬람에 대해 유럽의 정신적 전통을 옹호하면서 “다른 곶 또는 타자의 곶”을 향해 열린 유럽을 추구한다. (나는 하버마스에 대해서는 아예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물으면 그는 놀랍게도 다시 칸트의 영구평화론으로 도피한다. 가련하게도 그는 타인과의 만남을 동경하지만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진정한 만남을 위해서는 자기의 주체성을 타자에게 양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주체성으로부터 타인의 주체성으로 건너갈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주체성이란 단순히 논리적 사유의 주체성이 아니라 하나의 보편적 정신의 체계 곧 하나의 세계이다. 참된 만남을 위해서는 이중적 주체성 또는 이중적 세계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성을 보존하면서도 동시에 주체성을 지양해야 한다는 역설을 의미한다. 자기를 보존하면서 자기를 버리는 역설 속에 진정한 만남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데리다는 이 역설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한다. 그는 한 번도 그런 역설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는 그런 역설을 몸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우리는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철학에 입문한 뒤 오랫동안 그것은 내겐 치유할 수 없는 상처였다. 왜 서양철학과 중국철학 그리고 인도철학이 모두 자기에 대해 말하는데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철학에 대해서만 말하는가. 왜 우리는 남의 철학을 자기인식의 척도로 삼아야 하는가. 소설가 최인훈은 오래 전에 우리의 그런 자기상실을 이런 식으로 야유한 적이 있었다.―서양 사람들은 시지프스처럼 자기의 운명의 돌을 산 위로 밀어올리지만, 한국인들은 그런 서양인들의 엉덩이를 밀면서 아니 돌이 왜 이리 물컹하냐, 돌이 왜 이리 구리냐 하고 투덜댄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은 서양정신이 한 번도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적이 없다는 것과 대비되는 순간 하나의 긍정적 가능성으로 변모한다. 이를테면 장 교수가 나의 서양정신 비판에 대해 칸트와 헤겔에 기대어 서양정신을 옹호하는 것도 모자라 하버마스와 악셀 호네트까지 끌어들이는 것은 비판적으로 보자면 우리의 고질적인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렇게 철저히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튼 서양정신이 보여줄 수 없는 하나의 미덕이다. 그렇게 타자성 속에서 철저히 자기를 상실할 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대립하는 동서양의 온갖 정신세계들을 자기 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르시스의 꿈’에서 나는 그것을 정신의 임신이라 불렀던바, 그것은 주체의 자족성과 자기동일성을 추구하는 정신에게는 참을 수 없는 자기분열이겠지만, 그 분열을 주체적으로 사유하는 정신에게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정신의 입덧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할 줄 알기 때문에 무조건 옳고 서양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르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생각하면 내가 하려는 일은 서양정신의 자기보존과 우리의 자기상실을 종합하고 지양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타자 앞에서의 자기보존과 타자 속에서의 자기상실이 어떻게 양립가능한지를 단지 당위적 차원에서가 아니라―칸트적 의미에서―도식화해 보여주고, 이를 통해 어떻게 서로 다른 정신세계들이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자기를 얻을 수 있는지, 하나의 세계와 다른 세계의 참된 만남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내가 하려 했던 일이다. 이를 위해 나는 우리의 자기상실의 정신사를 한편에서는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긍정적으로 재해석하려 했던 것이다. ‘나르시스의 꿈’은 이를 위한 연습이었다.

김상봉/문예아카데미·서양철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