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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마녀들
냉전의 마녀들
  • 교수신문
  • 승인 2021.04.30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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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지음 | 창비 | 372쪽

1951년 5월 15일, 한 무리의 여성들이 유서를 쓰고 북한으로 향했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파헤친 여성들의 이야기


『냉전의 마녀들: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은 1951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극도의 위험을 감수하고 현장을 방문해 전쟁 참상을 조사한 국제민주여성연맹(Women’s International Democratic Federation, WIDF, 이하 ‘국제여맹’) 한국전쟁 조사위원회의 발자취를 추적한 책이다. 세계 주요 국가들에서 여성 리더로 활약하던 조사위원 21명이 모여 구성된 이 위원회는 거대한 폐허가 되어버린 북한에서 전쟁의 양상을 목격하고 고통을 호소하는 북한 주민들의 증언에 귀 기울였다. 신의주와 평양, 안악과 원산 등 여러 지역을 탐사한 위원회는 조사 결과를 『우리는 고발한다』(We Accuse, 1951)라는 제목의 소책자로 만들어 7개국 언어로 동시 발간했다. 하지만 미공군의 가공할 폭격 규모 등 미국에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이 보고서는 당시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소련의 선전 팸플릿으로 폄하되었고, 몇몇 조사위원들은 본국으로 돌아가 일종의 마녀사냥을 당했다. 그렇게 국제여맹 조사위원회는 한국전쟁기 북한지역 전쟁실태를 조사한 최초의 외부 조사단이라는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냉전 패러다임의 억압 속에서 그 활동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냉전의 마녀들』의 저자 김태우 교수는 전작인 『폭격』(2013)에 이어 치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조사위원회의 형성 배경, 성격, 보고서 작성 과정, 주장의 성과와 한계 등을 국내 최초로 종합 검토하며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연구의 전환을 가져올 새로운 관점을 더했다.

지옥으로 변해버린 지상의 삶

저자는 전작 『폭격』으로 출간된 자신의 박사논문 집필 과정에서 한국전쟁기 미공군의 공식문서들을 치밀하게 분석해 미국 군사작전과 한반도 전쟁피해 규모의 충격적인 실체, 즉 개전 초기 군사목표만을 제한적으로 공격하는 정밀폭격 전략이 중공군의 개입 이후 1950년 11월 5일을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어 북한의 도시와 농촌의 인구밀집지역을 집중공격하는 ‘초토화정책’이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국제여맹 조사위원회는 이러한 집중포화가 북한을 휩쓸고 간 1951년 5월 16일 밤 북한 신의주에 도착했고, ‘거대한 무덤의 산’이 되어버린 북한의 현실을 마주했다. 조사단은 10일이라는 짧은 현지조사 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몇개의 조로 나뉘어 신의주, 평양, 황해도의 안악과 신천, 평안남도의 남포시와 강서군, 개천군, 자강도의 희천군, 강계시 등에서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단은 모든 건물이 사라지고 불타버린 땅에 토굴을 파고 그 구덩이에서 살아가는 주민들, 하루 동안 8만 5천발의 소이탄이 하늘에서 쏟아진 현장, 광범하게 자행된 민간인 집단학살과 고문, 생매장, 참혹한 전시 성폭력의 흔적과 증언들을 기록했다. 폐허의 도시에는 여성과 노인과 어린아이들만 가득했다. 국가와 인종과 사상을 떠나, 조사위원들은 같은 여성으로서 북한 여성들에게 강한 연민과 연대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개성 강한 여성들이 모인 국제여맹 한국전쟁 조사위원회는 몇차례 논쟁적인 상황에 휩싸이거나 구성원끼리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최종보고서의 내용에 합의하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북한의 상황이 절박하고 절망적이라는 사실에 이론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사위원회는 미국을 강력하게 성토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들은 아무리 정당한 사유로 시작된 전쟁이라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모든 도시와 농촌을 완전히 불살라버리고, 도저히 군사적 목표로 간주할 수 없는 폐허 위에 계속 폭탄을 투하하는 행위를 묵과할 수 없다고 보았다. 힘없는 민간인에게 이토록 잔인한 전쟁을 어째서 끝내지 않고 있는지, 전쟁의 ‘지속’과 ‘형식’에 대해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철의 장막’을 넘어 평화를 꿈꾼 여성들의 진면목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반파시즘·반식민주의·반전평화·국제여성연대와 여성의 권리신장 등을 주창하며 조직된 국제여맹은 당시 세계 최대의 여성단체로서 특히 냉전기에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조직의 좌파적 성격, 동독과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의 지원이 설립과 활동에 미친 영향 탓에 당시 첨예한 냉전질서 속에서 이들이 진정으로 추구하고자 한 가치는 묵살당했다. 한국전쟁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는 허구적 정치선전물로 공격당했고 미국정부는 자국의 보수적 여성단체들로 하여금 국제여맹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했다. 유엔 또한 국제여맹의 유엔 내 공식 지위를 박탈하는 강경조치를 취했다.
이후 국제여맹은 반세기가 넘도록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한 채 망각되어왔다. 하지만 2010년대부터 서구 학계에서 국제여맹을 재평가하는 연구성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저자는 그 결과를 소개하며 국제여맹이 냉전블록을 넘어 서구의 여성단체들은 물론 베트남과 알제리 등 제3세계 식민지까지 활동범위를 넓혀 폭넓게 교류해왔고 조직의 주요 구성원들 또한 공산당과 무관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 다양성을 추구해 설립 초기부터 흑인과 아시아·아프리카의 식민지 여성들까지 평등한 회원자격으로 동참하고 당시 그 어느 국제여성단체에서도 볼 수 없는 다원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한다. 국제여맹이 결코 소련이나 국제공산당의 꼭두각시가 아니었고 오히려 억압적인 냉전질서와 정면으로 맞섰다는 주장으로, 이는 여전히 분단체제의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로 하여금 냉전의 그림자를 넘어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간 평화와 연대, 여성주의의 가치를 새롭게 고민하게끔 한다.
그녀들은 왜 마녀가 되었나

이 책은 국제여맹 조직이나 운동의 의의에만 집중하는 것을 넘어 한국전쟁 조사위원 개개인의 삶과 이야기를 복원하는 데도 공을 들였다. 저자는 조사위원회의 보고서 외에도 다양한 자료를 수집했는데, 특히 영국 대표인 모니카 펠턴, 조사 과정에서 ‘독립적 참관인’으로 활동한 덴마크의 카테 플레론 등이 조사가 끝나고 본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한 자료를 면밀하게 추적했다. 책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인물인 펠턴은 영국 노동당 애틀리 정권 하에서 주택문제 해결과 신도시 건설이라는 국책을 담당하는 도시계획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스티브니지 개발공사 총재직을 맡았던 여성이다. 펠턴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의 전쟁정책을 반대하며 전쟁의 실태를 알기 위해 조사위원회에 참여했다. 그녀는 다양한 신념을 가진 여성들로 구성된 조사위원회가 정치적 프로파간다와 무관하게 진상규명을 위해 협동해서 조사하고 모두가 확인한 사실만을 보고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조사가 끝난 후 그녀는 유엔군에 의한 학살 만행을 규탄하는 보고서 작성에 관여했고, 영국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 행동으로 그녀는 공직에서 해임당하고 보수 진영은 그녀를 반역죄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공격했다. 결국 스티브니지 총재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시작으로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내려놓은 모니카는 인도로 망명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녀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을 번복하거나 북한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화운동을 이어나가며 국제무대에서 활약했다.
저자는 이처럼 변호사, 정치가, 도서관장, 대학교수, 교장, 작가, 저널 편집장, 공기업 대표 등 자국에서 전도유망한 여성들이었던 조사위원들 개개인의 모습과 서사를 소설처럼 입체적으로 구현해냈다. 또한 파편으로 나뉘어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조사위원회의 여정을 시간순으로 재구성하면서 위원들 개개인의 동기, 내적 변화, 위원들 간의 갈등과 관계 변화와 같은 역동성까지 섬세하게 포착하는 한편, 그들이 목격한 전쟁의 양상과 전쟁피해의 규모와 같은 학술적 연구성과 및 그에 대한 역사학자로서의 분석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독특한 서술 방식을 사용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조사 활동의 성과와 한계를 비판적으로 검증하기도 했다. 예컨대 통역원을 비롯해 현지에서 조사위원회를 도운 이들이 북한 주민들이었던 점은 북한 측의 입장이 조사 과정에 반영되었음을 짐작게 한다. 황해도 학살의 주체로 밝혀진 우익치안대의 존재가 조사단이 만난 피해자들의 증언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 등 정황상 일부 정보와 증언이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사단 내부에서도 이런 상황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확인할 수 없는 피해 증언이나 북한 측에서 제공하는 사람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고 불만과 의구심을 드러기도 했다. 이런 한계점을 밝히며 저자는 현재 학계의 연구성과들에 근거하여 공중폭격, 집단학살, 전시 성폭력 등에 대한 국제여맹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검증한다. 특히 국제여맹 보고서의 폭격 관련 주장과 미공군 보고서의 내용을 병렬적으로 비교·검토했을 때 보고서에 서술된 폭격 방식, 폭탄 종류, 피해 양상 등이 미공군의 자료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것을 밝혀낸다.

국적을 초월한 여성들 간의 우정, 그리고 평화의 약속

전쟁으로 고통받는 제3세계 여성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고자 했던 외부세계 여성들의 모습을 통해 이 책은 냉전사와 한국전쟁사의 직접적인 주제와 함께 여성주의, 사회주의, 평화운동 등 폭넓은 가치를 동시에 다룬다. 특히 국제여맹 한국전쟁 조사위원회 활동은 1950년대 초반 ‘남성들 사이의 거인’으로 불리는 전세계의 여성들이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전쟁이 한창이던 한반도에 모여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미로울 뿐 아니라 장구한 여성평화운동의 도전과 시련의 역사에서 의미 있는 한 챕터를 구성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비록 그 활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거나 부당하게 비난받기도 했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이 국적을 초월한 평화 연대, 남성적 군사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맞대응, 자국민의 조롱과 비난을 감수한 용감한 실천을 몸소 일궈냈다는 사실이다. 냉전은 이 여성들의 존재를 역사에서 완전히 삭제해버리려 했지만, 흔들리는 분단체제와 탈냉전의 현실 속에서 국제여맹의 활동은 재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조사위원들은 북한 여성들로부터 “전쟁이 언제 끝날까요”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들었고 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놀랍게도 조사위원들이 한반도를 다녀가고 정확히 70년이 지난 2021년 현재까지도 전쟁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2018년 남북한 정상의 판문점선언은 ‘종전선언’을 최우선 선결과제로 제시했지만, 2021년 현재까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더 ‘전쟁의 지속’과 ‘전쟁의 형식’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했던 국제여맹 조사위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전쟁이 왜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는지, 그 수행 방식은 왜 그토록 잔인했는지,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더 진지하고 집요하게 물어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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