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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근대성
가족과 근대성
  • 교수신문
  • 승인 2021.03.1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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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혁 지음 | 이학사 | 331쪽

20세기 한국 근대화의 성공에는 가족이 있었다
한국 가족과 근대에 대한 철학적 성찰

서구적 관점에서 벗어나 한국 및 동아시아 근대의 특징들을 철학적으로 개념화하고 공동체 관련 이론을 재구성하는 데 천착해온 지은이 권용혁 교수는 이 책에서 한국 가족을 소재로 한국 근대의 특징과 미래상을 그려 보인다. 왜 한국의 근대화는 한국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서구 문명이 이식된 비서구 국가들과는 다른 양상을 띠는 것일까? 한국의 상대적인 성공은 연속된 우연의 결과물일까, 아니면 한국의 독특한 수용·적응 능력과 능동적인 재해석 능력이 함께 작용한 결과물일까? 이 책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으로 20세기 한국 근대화의 성공에는 (개인과 개인주의가 아니라) 가족과 가족주의가 있었음을 주장하며, ‘가족’과 ‘근대성’을 엮어 한국 근대의 독특한 모습을 개념화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한국의 가족주의가 21세기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안한다.

‘가족’과 ‘근대성’의 결합은 얼핏 어색해 보일 것이다. “근대는 가족이 아니라, 모든 신분적 속박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개인들이 성취한 결과물이지 않은가?”라는 문제 제기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반론이 근대화를 서구화로, 근대성을 서구 근대성으로 파악해온 서구 중심주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주장하며 서구 이론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한국 가족의 변화상을 고찰하면서 서구 중심적인 학문의 질서를 깨트리고 한국의 근대화를 바라보는 한국적 이론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한 이 책은 우리의 현실을 서구의 잣대로만 판단하는 문제를 비판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 가족과 근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세계사적으로도 설득력 있는 대안 모델이 될 가능성을 제안한다. 한국 근대의 가족 모델은 한국적 상황에서만 설득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비서구에서의 근대의 전개 과정을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설득력 있는 모델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세기와 21세기의 한국 사회의 독특한 모습을 개념화해 하나의 기준점을 제시하다

한국의 근대 가족은 서구의 근대적 가족 이론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독특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 해방 후에는 유교 전통과의 급격한 단절이 일어나 전통 유교적 가족제도가 일시에 폐기되었고, 70년대 이후에는 빠른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 중심의 공동체적 가족 문화가 도시 중심의 핵가족 문화로 급격하게 전환된다. 그 과정에서 생존과 번영을 위한 가족 단위의 결속이 강화되고, 한국의 도시형 핵가족은 부계 혈연 중심의 직계가족 이념(전근대)과 부부 중심의 낭만적 사랑과 민주적 소통 방식(근대)이 혼합된 복합적인 양상을 보인다. 가족 내에서의 가장의 역할도 복합적이다. 가장이 친척들과의 관계에서는 전통적 가족 질서에 따르지만, 가족 내에서는 약화된 부권을 유지하면서도 가족 간의 민주적인 대화와 가족 사랑을 중시하는 복합적인 태도를 취한다. 서구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이렇듯 상호 이질적인 것들, 배타적인 것들이 한국 근대 가족에서는 함께 작동되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이후에는 도시형 핵가족 외에 1인 가구, 다문화가족, 비혈연가족 등 새로운 가족 유형이 부상하는 한편 기러기 가족, 캥거루족, 연어족 등 독특한 형태로 가족주의가 유지되는 것이 확인된다.

이 책은 이러한 한국 가족의 변화상을 소재로 한국 사회의 변화상을 유추하고, 한국의 근대화와 그 특징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시도해나가면서 핵심적인 몇 가지 개념을 한국 가족을 매개로 분석한다. 그 개념들은 ‘복합적 사태(전통과 근대 그리고 현대의 중층화, 중첩화, 다양하고 이질적인 가족 형태의 혼성화)’, ‘복합 성찰성(한국의 가족 구성원들이 복합적 사태에 직면해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다층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동원한 사유 유형)’, ‘복합 근대(유교적 근대와 식민지 근대 그리고 미국적 근대가 중층·중첩·혼성적으로 섞여 있는 한국의 근대)’, 생존과 번영의 기초 결속 단위로서의 ‘일차적, 기초적 물질 중심 가족주의에서 이차적, 비물질적, 수평적 네트워크형 가치 중심 가족주의로의 이동’, ‘친밀성과 연대성의 호혜적 조합’, 외환 위기와 금 모으기 운동, 촛불시위, 촛불혁명 등으로 나타난 ‘따뜻한 민주주의의 구상’,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친밀성과 연대성이 동심원적으로 선순환되는 ‘열린 공동체주의’ 등이다. 이 개념들은 전근대와 근대를 직선적으로 파악하는 단순한 서구식 이분법적 구도로는 파악되지 않는 20세기와 21세기의 한국 사회의 독특한 모습을 해석하는 하나의 기준점을 제시한다.

철학과 현실의 대화를 통한 철학의 정상성 회복을 위하여

이 책에서 일관성 있게 시도하는 논점은 철학과 현실의 정상적인 관계 설정이다. 철학은 현실 사태의 변화 속에서 중요한 문제들을 포착하고 그 문제들에 대해 성찰함으로써 그 문제들을 적절하게 설명하고 일반화할 수 있는 논리적인 틀과 개념들을 구성하고 제시해야 한다. 이 책은 이러한 맥락에서 현실 적합성과 논리적 타당성을 갖춘 독특한 주장들을 펼쳐나간다. 먼저 「1장 우리에게 근대란 무엇인가?」에서는 한국 근대의 역동적인 변화 속에서 가족은 어떻게 변모해왔는지를 짚은 후 이 책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각 장의 논의를 일목요연하게 엮어나간다. 「2장 한국발 동아시아학은 가능한가?」에서는 한국발 동아시아학이 필요하며 가능하다는 점을 논의하고, 서구 중심의 담론에서 벗어나 보다 객관적으로 설득력 있는 한국발 동아시아학을 구성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논점을 제안한다. 「3장 한국 근대 가족과 철학」에서는 철학의 정상성 회복을 위한 시도로서, 한국 가족의 변화상을 고려한 가족에 대한 철학적 개념화와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논증한다. 「4장 한국의 가족주의와 사회철학」에서는 한국 가족주의가 전개되어온 독특한 역사와 현재적 모습을 보다 구체화해 정리하고, 이 정리를 바탕으로 한국의 가족주의가 21세기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안한다. 「5장 근대성 탐구」에서는 서구와는 매우 다른 근대의 길을 걸어온 동아시아 및 한국의 근대의 모습을 정리하고, 한국의 미래 가족을 예측하면서 사회에서도 친밀성과 연대성의 호혜적 조합이 가능하다는 점을 주장한다. 「6장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는 한국의 근대 가족을 공과 사라는 개념 쌍을 소재로 분석함으로써 한국 근대 가족은 서구와 동양에서 개념화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 대응하는 내용을 모두 포함하고 있을 밝힌다. 국민국가 시대의 민주주의의 문제를 가족을 소재로 다루는 「7장 국민국가 시대의 민주주의」에서는 한국 가족 및 가족주의의 변화상을 기반으로 한국 사회의 미래지향적인 민주주의의 모습을 구상할 수 있다는 논변을 시도한다. 근대성 개념에 대한 보다 성찰적인 기획을 선보이는 「8장 한국의 근대화와 근대성」에서는 근대성을 서구 근대성으로 파악해온 기존의 일반화된 이해 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한국 근대화의 특징을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몇몇 사례와 연계해 해석한다. 「9장 근대, 그 이후」에서는 한국 근대의 독특한 역사적 전개 양상이 지식정보사회,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맞이해 변화하는 모습을 해석하고, 21세기 한국이 패권주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능동적으로 세계화의 흐름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반패권주의적 연대를 강화하고 함께 상생·번영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야 함을 강조한다.

21세기 한국이 만들어갈 새로운 길을 위한 인문학적 제안

한국의 근대화는 서구식 근대의 철저한 수용과 이식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전통 속에도 근대화의 자양분이 충분히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20세기 후반기의 세계 가치 사슬의 변화와 그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에서의 수많은 실패와 좌절 그리고 성공 신화 등이 어우러진 하나의 역동적인 드라마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있다. 이 책은 한국인들이 걸어온 길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우리가 헤쳐온 길과 나아가야 할 길을 버무려 한 장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으며, 그 상상의 집을 짓는 데 필수적인 몇 가지 개념 틀과 논점들을 제시한다. 20세기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를 바탕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야 할 이때, 이 책의 인문학적 제안이 좋은 길잡이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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