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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함석헌 [43]
내가 본 함석헌 [43]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4.07.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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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아닌 시를 쓰는 시인"

꼭 일부러 피신하자는 것은 아니고 설사 그렇게 하기로 마음 먹었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시국도 아니었지만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나는 1974년 4월 19일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한 학기 대학원 학생들에게 '유기합성 특강'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였고 또한 구라파로 미국으로 여행까지 하면서 편하게 지내고 있는 동안에 국내에서는 참으로 일일이 말하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민청학련' 사건이 벌어지면서 선생님 신변에도 가지가지로 어려운 일들이 맴돌고 있었던 것을 선생님 글을 통해서 당시의 선생님 심정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75년 1·2월 합병호에 쓰신 선생님의 신년사라고 할 수 있는 '씨 의 심판'이라는 글에서 우리는 당시의 선생님의 심정과 당시의 선생님의 생활의 편모를 볼 수 있다.


우선 이 글에서 선생님은 당시 조직되어 있었던 '민주회복국민회의'의 대표위원을 수락하지 않으셨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까닭을 선생님의 글을 통해서 직접 들어보자.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국민회의는 순수한 씨 의 운동으로 이끌어 나가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탁을 아울러 마시고도 그 맑음과 평화에 끄떡이 없는 바다 같은 슬기와 힘이 내게 없는 이상 나는 내 분을 지켜 깊이 생각하여 내 할 책임이 분명해지는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대표위원을 사양하는 뜻을 표하고 잠잠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지난 16일에 중앙정보부 6국에 불려가 6시간 넘도록 국민회의에 대해 조사를 당하고 오면서도 내 마음의 편안에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국민투표 한다는 소리가 벼락같이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은 아주 어려워 집니다. 이제 그 때문에 회의를 연다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도 나는 '모른다'하고 있을 수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일이 어느만큼 어려운가 그 윤곽이라도 알아보고 근심이라도 같이 나누는 것이 동지로서의 의리라는 생각에 우선 나가보기로 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의 이 글에서 나는 몇 년 전에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당수로 교섭 받으셨을 때 이를 물리치셨던 그 심정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순수한 씨 의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생각되는 '민주회복국민회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선생님 보시기에는 '민주회복국민회의'는 다분히 정치적 색깔이 농후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 대표위원직 수락을 주저하고 계셨던 것이다. 선생님의 어느 글 중에 원래 수줍어서 사람 앞에 나가면 말도 변변히 못하는 나를 이렇게 사나운 사람으로 만든 놈이 누구냐? 라는 아주 시니컬한 부르짖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깊이 간직하고 계셨던 그 순수성은 함 선생님에게서 체감할 수 있었던 그의 求道 정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눈빛은 항상 맑았고 그의 몸가짐은 求道僧 바로 그것이었다. '주 세상 계실 때 늘 슬퍼하셨네'라는 찬송가의 구절을 수없이 읊조리면서 그는 슬픔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그가 항상 암송하고 있었던 '古木千年 枝二三 天然  向東南'으로 시작되는 '古木'이라는 작자미상의 古詩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청탁을 아울러 마시고도 그 맑음과 평화에 끄떡이 없는 바다 같은 슬기와 힘"을 기다리고 있는 함석헌에게 지난번에 1979년 10월 26일을 옲는 만가라고 말한 '악의 세력'의 난데없는 국민투표라는 날벼락 같은 소리가 고요히 기다리고 있는 함석헌에게는 절대절명의 동원령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성당의 입구에서 기관원들에게 저지당하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구속자와 같이 하는 가족들의 기도회'에 참석코자 발길을 돌렸으나 명동성당에서 종로5가까지 걸어가는 도중에서도 여러 번 기관원들과의 실갱이를 뚫고 기독교회관에 당도한다. 선생님의 글을 통해 한 장면을 음미해보자.


<을지로를 가로건너 청계천을 건너 종로로 나가려 하는 즈음에 뒤따르던 두 사람은 다가와서 덮쳐잡고 옆에 다방으로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나는 내 나이를 잊고 뿌리치고 장안사람은 다 들으라고 외쳤습니다. "왜이러시오" "당신들 뭐요?" 내 힘이 세어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 속에 양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장면을 눈앞에 그려보면 당신 말대로 궁지에 빠진 단말마를 연상케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제 결정적인 시대의 폭풍은 우리를 깨워 자려해도 잘 수 없이 만들었습니다. 이제 모든 고난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경고요 역사의 주인으로 다듬어 내기 위한 시련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가지 예언만은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점점 더 인간적으로 깨어갈 것이요 역사는 점점 더 씨 이 그 주인이 돼 갈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난 요나처럼 "나 때문이다. 나를 집어 바닷속에 던져라, 그러면 너희가 살 것이다" 하게 될 것입니다…. 시대가 무엇입니까? 민중의 입김입니다.>(전집 8: 187)


오죽 답답했으면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하셨을까?


<국민과 정부가 다같이 전국적인 근신일을 선포해 일체의 유흥·연락을 중지하고 적어도 하루동안 단식·회개·명상한 후 투표할 것. 이것을 할 마음이 있거든 국민투표 합시다. 못하겠거든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범국민운동은 바로 이것하잔 것입니다.>


지금부터 꼭 30여년 전의 글이다. 그때의 '민청학련' 사건에 투옥되었던 바로 그 당사자가 국무총리가 된 이 참여정부 시대에 함 선생님이 살아 계시다면 역시 똑같은 글을 쓰지 않으셨을까?
1975년 2월 15일 개헌서명운동 및 민청학련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풀려 나오는 날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외친다.


<그 개선장군들을 보고 내가 환영하는 말을 해야겠는데 적당한 말을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본래 시인이 못되지만 정말 어느 때보다도 더 내 붓끝의 무딘 것을 한탄했습니다. 그래서 내 소리로는 못할망정 젊어서 한번 듣고 이날껏 못 잊고 있을 때 일 없을 때 씹어보는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의 글귀를 빌어서 하기로 했습니다. Do and die, 하고 죽는다! 이것은 영국이 러시아와 싸웠던 크리미아 전쟁 때에 있었던 한 輕騎兵隊의 용감한 사적을 찬양한 시 안에 있는 말입니다…. 전편이 여섯 절인데 그중 가장 좋은 데가 둘째 절입니다.
경기병대 앞으로 갓 했을 때 / 어느 한 사람이 당황했던가 / 아니다. 비록 누군가가 바보짓 할 줄 / 다들 알고 있었지만 / 그들이 할 일은 하고 죽음이다 / 죽음의 골짜기 속으로 / 육백 용사는 달렸다.
듣는 말에 사형을 선고하자 그것을 받는 학생이 "영광입니다" 했답니다. 이것이야말로 큰일입니다. 누가 정말 재판장이며 누가 죄수입니까?… 나는 그것(옥문에서 나오는 광경)을 보다가 혼자 속으로 "우리나라 절대로 비관 아니다. 기백이 저렇고 서는 못사는 법 없다!" 했습니다….
신기합니다. 어쩌면 동아일보 사건(동아일보 기자들 자유언론 실천선언)이 그렇게 묘하게 준비됩니까? 신랑을 맞으려는 신부집 대문처럼 동아일보는 활짝 열렸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우연이라 하겠습니까. 이것이 아니라면 저것도 될 수 없었을 것이고 저것이 아니라면 이것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것도 원리는 다 같은 데서 나왔습니다. Do and die, 하고 죽는다!
그렇습니다. 하고 죽읍시다. 이 역사가 살아날 것입니다. 씨  여러분 3월입니다.>(전집 8: 200-202)


함석헌은 시 아닌 시를 쓰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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