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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려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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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신문
  • 승인 2021.02.22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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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샹린 지음 | 박승만, 김찬현, 오윤근 옮김 | ITTA | 364쪽

“중국의학의 근대사에 관한 책을 한 권만 읽으려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읽어야 할 책이다. 레이샹린의 의학, 과학, 근대, 그리고 국가에 대한 분석은 눈부시게 독창적이고 설득력이 있으며, 논증은 감탄할 정도로 명료하다. 이 책은 20세기 중국 연구뿐 아니라 과학 연구와 세계 보건 역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하버드대학교 구리야마 시게히사 교수

 

읻다의 “척도와 구성” 시리즈, 첫 번째 책 『비려비마: 중국의 근대성과 의학』이 출간되었다. 중국의학사를 연구한 레이샹린의 저작인 이 책은 20세기 초반 중국의학의 역사를 살핌으로써 중국의학 고유의 근대성, 더 나아가 중국 고유의 근대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탐구한다.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세계의 전통 의료 대부분이 소멸되거나 주변으로 밀려난 것과 달리, 중국의학은 독특하게도 과학과 근대성의 공격을 견뎌내고 국가의 공인을 받은 지식이 되었다. 중국의 모든 과학 분야를 통틀어 “1850년에서 1920년까지 가해진 근대 과학의 충격에서 살아남은”(벤저민 엘먼) 전통 학문은 중국의학이 유일하다. 이제 중국의학은 세계보건기구에 의해 보완대체의학의 중요한 흐름으로 인정받고 있을 뿐 아니라, 각국의 의료 서비스에도 편입되고 있다. 저자인 레이샹린은 중국의학의 근대사가 중국이 근대성을 탐색해나가는 과정의 핵심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의학사 서술은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을 대립시킴으로써 중국의학을 중국의 의학적 근대성으로부터 배제해왔다. 여러 역사학자는 근대적 제도와 가치, 지식이 중국의학의 궤적에 미친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했지만, 중국의학이 서양의학의 도입, 공중보건과 의료 행정의 구성 과정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별다른 연구를 진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샹린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의학의 독특함은 바로 중국의 근대성과 얽힌 치열하고도 모호한 관계에서 비롯한다.

 

“나귀도 아니고 말도 아닌 잡종의학”

새로운 중국의학의 탄생을 위한 세 겹의 싸움

 

1920년대까지만 해도 근대성의 안티테제로 여겨졌던 중국의학은 반세기 후 어떻게 중국 고유의 근대성에 대한 강력한 상징이 되었을까? 이 문제의 열쇠는 ‘비려비마(非驢非馬)’라는 이 책의 제목에 있다. 요컨대 역사적 전환의 핵심은 ‘나귀도 아니고 말도 아닌’ 새로운 ‘종(種)’의 중국의학이 등장했다는 데 있다. ‘비려비마’는 사실 경멸조로 쓰이는 관용구이다. 근대 중국의학을 향한 이 말은 나귀와 말의 잡종인 노새, 즉 서양의학도 중국의학도 아닌 ‘잡종의학’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한편으로 근대 중국의학이 서양의학은 물론 그때까지의 전통과도 구분되는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과정은 세 겹의 싸움이었다. 근대 중국의학은 서양의학 그리고 민족주의 국가와 공존하며 제도적·인식적·물질적으로 변혁을 거치면서 탄생했다. 첫째, 제도적 변혁이다. 중의는 국가와 의학이라는 관계 속에서 서의와 겨루어야 했다. 새로이 등장한 근대 국가와 의학의 접합 속에서 서의와 중의는 국가 보건 행정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경쟁했다. 둘째, 인식적 변혁이다. 서의들은 중국의학에 세균 이론이 존재하지 않으며, 병인(病因)을 파악하지 못하기에 질병을 치료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세균 이론을 수용할 것인가, 기존의 모습을 고수할 것인가. 중대한 기로에 놓인 중의들은 ‘변증론치(辨證論治)’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셋째, 물질적 변혁이다. 중의는 서의의 공격에 맞서 중약(中藥)의 유효성을 지켜내야 했다. 서의들은 정제되지 않은 풀뿌리나 나무껍질을 달여 먹는 중약이 유효한 성분만을 분리해 투여하는 서양의학을 따라올 수 없다고 공격했다. 이에 중의는 약물을 연구하는 새로운 방식인 ‘역순 연구 절차’를 제시함으로써 딜레마를 벗어나려 했다.

 

‘대문자 근대성’이 아닌 ‘소문자 근대성’에 대한 탐구

한의학은 어떠한 형태의 근대성을 보여주는가

 

새로운 중국의학의 모습을 통해 레이샹린은 근대성이라는 개념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는 유럽이라는 특수한 사례를 보편으로 추켜세우고 비서구 세계를 여기에 맞추어 재단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레이샹린은 자신만의 근대성을 형성해낸 중국의학의 예를 살펴봄으로써 새로운 방식의 근대성, ‘혼종적 근대’의 일례를 제시한다. 이는 ‘소문자 근대성’의 사례를 탐구함으로써 ‘대문자 근대성’을 향한 대항을 시도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사례는 어떠한가. 대개 한의학은 과거의 전통을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한의사와 서양 의사 양측이 만들어낸 신화에 가깝다. 실제로 한의학은 일제강점기 이래로 서양의학이라는 새로운 대상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다듬어야 했다. 한의학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경로를 통해 어떻게 변화했는가? 한의학을 ‘전근대’로 규정하는 시선은 정당한가? 한의학은 어떠한 형태의 근대성을 보여주는가?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더불어 한의사 및 서양 의사, 의학사 연구자, 넓게는 근대성을 탐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흥미롭고 독창적인 통찰을 제시할 것이다.

 

“생물에 대한 연구를 가장 근본적으로 전환하게 된 것은 감각기관을 확장하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에 따른 결과라기보다 새로운 대상에 대한 분석에 접근하면서입니다. 오히려 유기체를 바라보는 방식, 유기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 관찰이 답해야 하는 질문을 정식화하는 방식이 변화한 결과입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 단순한 관점의 변화가 장애물을 제거하고, 대상의 어떤 모호한 면, 그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어떤 관계를 드러냅니다.”

- 프랑수아 자콥, 『생물의 논리』 중

생명과 신체를 이해하는 분석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척도로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을 가늠하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기술의 발전을 통해 보다 정확하고 세밀한 측정이 가능해지면서 유기체를 이루는 부분, 다양한 기관에 대한 명확한 분석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척도와 구성’에서는 이러한 관찰과 이해를 통해 부분과 전체에 대한 관계, 하나의 전체로서의 생명체에 대한 해석과 하나의 유기체가 환경과 맺는 다양한 관점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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