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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아일보의 탄생
조선∙동아일보의 탄생
  • 교수신문
  • 승인 2021.02.05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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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 지음 | 역사비평사 | 320쪽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정책을 바꾸게 만들었다. 헌병 경찰을 이용한 강압적인 무력통치에서 이른바 문화정치로의 변화다. 통치방침의 변화에 따라 언론통제가 완화되면서 ‘조선 민족의 불평을 완화해주는 안전판이며 민심의 흐름을 살피는 바로미터’로 한글신문 창간이 허용되었고, 이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창간되었다.

조선일보는 1920년 3월 5일, 동아일보는 같은 해 4월 1일 창간되었으니, 2020년에 두 신문 모두 창간 100돌을 맞았다. 저자는 이 두 언론에 성대한 상찬과 비판이 있어야 할 100주년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논쟁도 없이 사사(社史) 속 궤변이 인용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그동안 연구한 일제하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과 경영, 폐간에 이르는 과정을 파헤쳐 근대 신문의 역사를 구성했다.

 

마침내 100년의 역사를 맞이한 두 신문

유구한 역사 속에 감춰진 사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정책을 바꾸게 만들었다. 헌병 경찰을 이용한 강압적인 무력통치에서 이른바 문화정치로의 변화다. 통치방침의 변화에 따라 언론통제가 완화되면서 ‘조선 민족의 불평을 완화해주는 안전판이며 민심의 흐름을 살피는 바로미터’로 한글신문 창간이 허용되었고, 이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창간되었다. 조선일보는 1920년 3월 5일, 동아일보는 같은 해 4월 1일 창간되었으니, 2020년에 두 신문 모두 창간 100돌을 맞았다. 저자는 이 두 언론에 성대한 상찬과 비판이 있어야 할 100주년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논쟁도 없이 사사(社史) 속 궤변이 인용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그동안 연구한 일제하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과 경영, 폐간에 이르는 과정을 파헤쳐 근대 신문의 역사를 구성했다.

보통 우리는, 일제 말 천황을 떠받들고 친일 기사로 도배되었지만 적어도 창간 초기에는 정간과 압수를 당할 정도로 항일을 내세웠다고 믿는다. 일제강점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가해진 몇 번의 압수와 정간 사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 등이 두 신문을 ‘민족의 정론지’로 인식해온 이유였다. 사실, 또 그렇게 학습해왔다. 우선, 하나의 큰 사실부터 바로잡는다. 바로, 조선일보의 창간 주체다. 대체로 많은 사람이 조선일보의 창간 주체는 대정실업친목회라는 경제단체로 알고 있다. 그에 맞게 조선일보는 비정치적인 ‘실업신문’을 표방했으며, 그 창간 목적이 주효했는지 조선총독과 경무국장으로부터 창간 허가를 따냈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창간 주체는 대정실업친목회가 아니라 정확히 대정친목회이며, 이 단체는 내선융화운동을 목적으로 경성의 유지들이 조직한 친일단체였다.

그런데 창간 초기 조선일보는 불온한 기사로 23회에 달하는 발매 반포 금지와 두 차례의 정간을 당하며, 30건의 기사를 압수당한다. 정간과 압수는 곧 일제의 탄압을 의미하며, 이는 곧 저항(항일)으로 연결된다. 조선일보의 ‘항일’ 이미지는 이때 처음 대중에 인식되었다. 이 지점에서 큰 의문이 생겨난다. 친일단체가 만든 신문사의 항일 기사라니! 이 아이러니와 미스터리는 무엇인가? 당대에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개벽』 필자는 조선일보가 대정친목회의 주의·강령을 돌아보지 않고 경영난 타개를 위한 신문 판매 확장책으로 항일 기사를 게재했다고 본다. 기업 경영에는 능했지만 신문 경영에는 어설펐고, 3·1운동 이후 독립의 열망을 끓어오르던 세태를 무시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당대 의제를 선점하지 못한 채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발언의 수위를 조절하지 못한 조선일보는 결국 최다 압수를 당하고 독자를 만나지 못한다. 아무리 민족적 기사를 쓰고 항일 기사를 쓴들 그것을 읽는 독자를 만나지 못하면 기사의 생명력은 없다. 조선일보에게 영업용 항일 기사는 단기적으로 득이 되지 못한 셈이었다.

 

개혁의 실패는 혁신으로

동아일보의 개혁, 조선일보의 혁신

 

동아일보는 김성수의 자본을 기반으로 창간되었지만 창간 초기에는 경영권이 특정 개인에게 집중되지 않았고, 전하는 기사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유심론과 유물론을 오가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였다. 그러나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을 자임하던 동아일보도 자금난을 피해가지 못하고 1921년 주식회사로 발족했다. 주식회사 출범 후 동아일보의 주도층은 대주주 김성수와 그의 의중을 대변하는 사장 송진우로 바뀌었으며, 신문의 논조도 조선의 즉각 독립을 보류하고 현실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운동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수용했다. 지면은 창간 정신보다 주식회사의 입장에 충실한 방향으로 나아갔고, 수익을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이에 동아일보 내부에서는 경영진과 사원의 갈등이 쌓여가고 외부에서는 동아일보의 개량화와 상업화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1924년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의 연재는 동아일보에 대한 공개 성토의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동아일보 기자들은 경영진 퇴진을 요구하며 개혁운동을 전개한다. 편집국장에 인선된 홍명희는 개혁 이전의 대주주 입장을 반영하던 동아일보와 명확히 선을 긋고 공리공복을 위한 신문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김성수와 그의 형제들은 주식을 대거 매입하여 소유상의 지배권을 강화했다.

개혁 주체들은 끝내 개혁을 성공시키지 못하고 퇴사하면서 조선일보로 옮겨갔다. 동아일보 개혁 세력은 조선일보에서 그 뜻을 펼치게 되었고 조선일보 혁신에 들어갔다. 바로 이 혁신을 계기로 조선일보는 그 사사에서 자랑하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통일전선인 신간회의 기관지가 되었고, 이때의 항일운동을 적극 내세우게 된 것이다.

 

왜 그들은 소위 '친일'로 나아갔는가?

기업과 샐러리맨으로서 신문사와 기자

 

저자는 동아일보·조선일보를 민족지와 친일지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보다는 그들이 무엇을 계기로 친일로 나아갔는지를 살펴본다. 1920년대 중반 동아일보의 개혁운동, 조선일보의 혁신운동이 있었음에도 두 언론사는 확실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친일적으로 노골화했다. 폐간 직전의 논조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와 다를 바 없었다. 신년호 1월 1일 1면에는 일왕 부부의 사진이 실리고 조선총독의 연두사가 실렸다. 친일의 고착화―이는 총독부의 언론 탄압으로 인한 부득이한 것인가, 아니면 타협과 자발에 의한 것인가.

동아일보는 1925년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김성수가 경영권과 편집권을 장악하고, 조선일보는 1933년 방응모에게 인수되고 그의 사장 취임을 계기로 소유주의 언론관이 편집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질적인 경영난은 언론사의 상업화를 부채질했다. 과거 저항의 상징이던 압수나 정간은 기업 경영을 위해 피해야 하며, 광고 유치에 온 힘을 기울였다. 편집국장의 주된 업무는 일제의 검열 수준을 벗어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기사를 좋아한 독자도 만족시켜야 했으므로 한글신문들은 독자와 총독부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해야 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던 총독부도 언론사에 천천히 압박을 가하면서 신중했는데, 이 같은 통제정책은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과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180도 전환했다.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는 사실상의 정간과 다를 바 없는 휴간에 이어 결국 1937년 폐간되었고, 동아일보도 무기정간을 당했다. 폐간과 굴복의 기로에서 동아일보는 주식회사의 파탄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총독부의 「언문신문지면 쇄신요항」을 수용하고 인사 개혁 요구를 받아들였다. 한편 조선일보는 총독부의 탄압이 들어오기 전에 신문사가 입을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논리로 순응의 길을 택했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내에는 민족주의의 지도적 지위를 포기하지 않는 다수의 기자들이 존재했지만, 이미 그들은 신문사에 고용된 샐러리맨에 지나지 않았고, 주식회사의 경영에 관여할 수도 없었다. 언론의 편집방침은 이윤을 얻으려는 기업적 가치에 충실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친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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