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9 07:50 (월)
대학정론-패러다임 전환기의 지성
대학정론-패러다임 전환기의 지성
  • 정대현 논설위원
  • 승인 2004.04.1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사회는 패러다임 전환기에 들어 선 것으로 보인다. 정치의 중심축이 40대로 젊어지고 여성들이 그뤂을 이루어 정치 선두를 이끌고 있다. 지역 정당을 탈피하는 전국 정당이 나타나고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진출하는 것이다. 총칼의 쿠데타나 국회다수의 힘보다는 촛불이나 감성의 여론이 정치방향을 결정한다. 밀실의 각서보다는 인터넷의 영상이 정치언어의 설득력을 이룬다.

많은 사람은 한국사회가 혼란스럽다고 한다. 세대간에 대립이 있고 남자들의 기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열세의 정당은 아직도 지역구도에 호소하고 전 같으면 사형감들이 티비에 나와 판을 친다고 본다. 대학교수가 쿠데타를 말하고 독재자의 딸이 구국일념을 논하는 것을 듣는다. 언론이 자유라고 하지만 극단적 좌우의 관점들이 대조되고 있다. 사람들은 국론 분열을 염려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지성은 어떤 자리에 서야할 것인가?

‘미아’(1902)라는 그림이 있다. 한 어린이를 가운데 두고 부처, 예수, 공자가 둘러 서 있고 한 걸음 뒤의 노자는 시선을 달리 하는 그림이다. 모더니즘은 이 그림에서 갈등이나 모순을 본다. 네 개의 경쟁적 이론들이 하나의 공간 체계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용의 도통중(道通中)은 이론이 아니라 사람들을 본다. 하늘 아래 모순은 없기 때문이다. 이곳은 모두가 맞추며 살아가는 세계인 것이다. 사람이 이론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지성은 한국사회의 현 단계를 해석하여야 한다. 해석의 관점은 다양한 선택에 열려있고 그 관점들은 존중되어야 한다. 모더니즘의 입장에 서면 한국사회는 혼란스럽다. 합리주의, 유일체계, 논리중심, 자기 확실성의 모더니즘에 의하면 필연적 귀결이다. 그러나 도통중의 입장에서는 사람을 지배하고 사람의 주인이 되어야하는 이론이란 없다. 모든 것은 중을 살려 서로 통하면 도에 이르는 과정이다. 인내천(人乃天)의 구조인 것이다. 중은 이익집단적 중이 아니라 도로 통하는 역사적 중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지성은 현 단계의 차이들을 인정(認定)해야 한다. 이 의견의 불일치를 대상의 차이가 아니라 의견의 체계의 차이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대상적 차이로서의 의견 불일치가 소통할 수 없는 까닭은 다른 대상에 관해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견의 체계의 차이는 체계 다원성으로부터 바라보는 대상 해석의 열림을 가능하게 한다. 차이에 대한 의미론적 상승이고 개념적 반성이다. 의사소통의 지성적 처방일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