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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지성사의 ‘내로남불’ 들춰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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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강수
  • 승인 2020.11.12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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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기_철학자의 거짓말
프랑수아 누델만 지음 | 문경자 옮김 | 낮은산 | 344쪽

 

거짓말에 대한 도덕적 경멸 지우고

철학자의 분열된 내면 속으로

언행합일의 허구를 까발리다

 

단순한 정직보다 소중한, 복잡한 거짓말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소설, 『위대한 유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작중 주인공 핍이 매부 조에게 한소리 듣는 장면이다.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신해도 좋다, 핍. 즉, 거짓말은 거짓말이라는 거다. 어떻게 해서 하게 되었든 넌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했다. 거짓말은 거짓말의 아버지인 악마의 입에서 나와서 결국 그 악마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더 이상 거짓말만큼은 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조는 덧붙인다. “그건 천하거나 평범한 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아니란다.” 무슨 욕심을 품었든 거짓말은 지름길이 아니라는 거다.

그런가 하면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다음 문장들로 정직을 냉소하고 거짓말을 추켜세웠다.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사람들 대부분이 진실을 말하는 까닭은 뭘까? 어떤 신이 거짓말을 옹호해서? 아니다. 거짓말은 창작, 가장, 기억을 요구하므로 진실을 말하는 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거짓말은 언제나 열댓 개의 다른 거짓말을 필요로 한다. 거짓말을 시작한 이는 어깨에 다른 거짓말을 얹어가며 “악마의 구렁텅이” 위에서 줄타기를 해야 한다. 그 ‘배짱’이 없어서 정직을 택하는 거라고 니체는 인간을 놀려 먹는다. 거짓말도 능력이라는 거다.

하여간 거짓말은 지름길이 아니고, 위태로우며 골치 아픈 짓이다. 언뜻 상반된 가치관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디킨스와 니체가 함께 인정한다. 거짓말은 복합적이다. 이것을 뒤집으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거짓말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인간 내면의 가장 복합적인 부분에 다가설 수 있다. 바로 여기서 프랑수아 누델만의 『철학자의 거짓말』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작과 함께 저자는 간청한다. “도덕적 판단을 잠시 내려놓자.” ‘거짓말 나빠요’를 앞세운 단죄는 앞으로의 논의에 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건 “거짓말이 가진 복합성의 가치”를 외면하게 만들 뿐이다.

 

프랑수아 누델만(Francois Noudelmann). 파리 제8대학,  뉴욕대, 존스 홉킨스대 등지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낮은산출판사

 

위선자 루소와 배신자 보부아르 이해하기

누델만이 불러낸 ‘거짓말하는 인간’의 표본은 철학자들이다. 말하자면, 살아오면서 말을 너무 많이 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말과 글은 그들의 삶과 불화하고 이 불협화음은 대중을 실망시킨다. 이를테면 장 자크 루소. 그가 하숙집 하녀였던 테레즈와 관계에서 태어난 다섯 명의 자식을 모두 고아원에 보냈다는 ‘비밀’은 유명하다. 아이들을 버린 뒤 루소는 근대적 시민 교육의 기틀을 닦은 고전 『에밀』을 썼다. 심지어는 이렇게 썼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옆에 꼭 붙어 있어라.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떠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는 (아이의) 진정한 가정교사다.”

또 시몬 드 보부아르. 그는 여성 해방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위대한 저작 『제2의 성』을 썼다. 『제2의 성』에서 보부아르는 “여성은 타인의 사랑을 통해서만 존재를 확인 받도록 길들여져 왔다. 진정한 사랑은 자유로운 두 사람의 상호존중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이 강직한 문장들이 쓰여지던 시기에 그에게는 넬슨 앨그렌이라는 미국인 애인이 있었는데, 넬슨에게 띄우는 연서에서 보부아르는 사뭇 다른 목소리를 들려준다. “당신을 갈망하는 저는 완전한 한 여성입니다. 나는 이제 당신을 향해 불타오르고 애태우는, 당신을 향한 행복한 욕망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

루소의 위선과 보부아르의 배신 앞에서 우리는 18세기의 지식인들, 20세기의 페미니스트들처럼 당혹스럽다. 당혹스러운 독자에게 누델만은 제안한다. 호흡을 고르고, 도덕 판단은 잠시 치워두고, 모순 자체를 볼 것을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루소는 아이들을 버렸음에도 (감히) 교육론을 쓴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자기 자식들을 버렸기 때문에 교육론을 썼다”고 볼 수도 있다. 『에밀』은 죄책감과 불행의 철학적 출구였던 셈이다. 보부아르의 경우는 더 간명하다. 『제2의 성』을 쓴 보부아르와 연애편지를 쓴 보부아르의 인격은 “언어의 다양한 층위를 통해 구축된 유연한 자아”의 범주 안에 공존한다. 요컨대, 『제2의 성』은 불어로, 편지는 영어로 쓰여졌다.

 

투명한 자아, 조화로운 삶이라는 허상

누델만의 작업은 다음과 같은 진실을 폭로한다. “삶과 담론 사이 조화란 기만적이며 자기에 대한 허구다.” 투명하고 미끈한, 통합된 자아라는 건 없다. 인간의 삶은 모순된 선택과 욕구로 점철돼 있기 때문에 차라리 이런 표현이 정확하다. “인간의 정신은 진실보다 거짓을 통해 훨씬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에라스뮈스, 『우신예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다 함께 이따금 조직적으로 모른 척하는 진실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글과 삶의 모순적 병존을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도덕은 잠시 제쳐두고 거짓말을 받아들여보자”는 누델만의 제안은 그러나 불완전하다. 도덕을 언제까지고 제쳐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숨가쁘게 단죄의 순간이 찾아 오곤 한다. 다만 이런 생각은 해볼 수 있겠다. 단죄에 익숙한 사람의 세계와 관찰에 숙달된 사람의 세계는 다를 것이다. 단죄하는 이는 자신의 거짓마저 잘라낼 것이고 관찰하는 이는 자신의 거짓까지 들여다 볼 것이다. 『철학자의 거짓말』은 거짓을 들여다 볼 때 우리는 더 깊이 알게 된다고 말한다. 덕분에 ‘내로남불’의 시대에 인식의 균형을 위한 지침서로 읽힌다. 오늘날 가장 질 나쁜 거짓은 “자신만 진실을 쥐고 있다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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