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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섭’의 농업사 연구…근대화의 두 가지 길
‘김용섭’의 농업사 연구…근대화의 두 가지 길
  • 김성보
  • 승인 2020.11.03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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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용섭 명예교수의 업적과 학문적 의의

평생 한국 농업사 연구에 매진해온 김용섭 교수가 향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제 그의 학문은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그는 청소년기에 식민지 경험과 분단, 전쟁의 비극을 온몸으로 맞았던 해방세대에 속한다. 그는 해방세대가 겪은 체험과 고민을 역사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으로 승화시켜, 그 학문의 울타리 안에서 그 시대의 문제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답을 찾아왔다. 그의 학문 여정은 그 시대의 자기 증언으로서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 이후를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에게는 어떤 시사점을 주고 있을까? 김용섭의 역사학이 담고 있는 역사성과 현재성을 간략히 정리해본다.

 

한국농업사 연구의 대가인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0일 별세했다. 사진 = 연합뉴스

 


김용섭은 『조선후기농업사연구(Ⅰ)(Ⅱ)(Ⅲ)』, 『조선후기농학사연구』, 『한국근대농업사연구(Ⅰ)(Ⅱ)(Ⅲ)』, 『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 『한국중세농업사연구』, 『한국고대농업사연구』 등 농업사 9부작을 필생의 업적으로 남겼다. ‘김용섭 저작집’은 양안, 토지매매문기, 추수기, 농서 등 방대한 자료를 검토하여 한국사 연구의 실증성을 한 단계 높였다. 그리고 민족 주체적인 시각에서 고중세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한국의 농업사를 하나의 체계로 정리하여 한국사의 변화를 거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해주었다. 


학계에서는 통상 그의 역사학에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식민사학의 타율성론·정체성론을 극복하기 위해, 그 대안으로 한국의 역사 속에서 근대사회로 이르는 자생적인 발전의 계기를 밝혀내는 데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나 그가 농업사 연구를 선택한 직접적인 이유는 한국사회가 직면한 사회 문제들의 근본 원인을 밝혀보려는 보다 실천적인 이유에서였다. 

 

농업사 연구는 실천적 이유에서 비롯

 

실향민이기도 한 그는 분단의 극복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고, 그 분단을 고착화시킨 6·25전쟁의 내부 원인 해명에 노력했다. 민족상잔의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그 원인을 근본적으로 밝히려면 그 사회경제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농업 위주의 사회였던 한반도에서 펼쳐졌던 지주와 농민의 사회갈등에 주목하면서 그의 농업사 연구가 시작되었다. 


혹자는 ‘내재적 발전론’이란 외세에 짓밟혔던 열등감을 보상받기 위해 민족의 위대한 발전의 역사를 과장하려 한 민족주의 열망의 산물로 보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민족의 어두운 상처를 정면에서 바라보면서 그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스스로의 내적 배경에서 찾으려 함이 그의 학문의 원점이다. 


김용섭의 6.25전쟁관은 미국의 진보적 학자들이 주장한 한국전쟁 내전론과도 구별된다. 이 내전론은 미군정이 한반도 내부의 사회갈등을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증폭시켜 결국 전쟁으로까지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미국과 한국 민중 사이의 대립·갈등이 역사 해석의 기본 축이다. 이에 비해 김용섭은 조선후기 이래 누적되어온 한국 농촌의 지주와 농민간 갈등이 일제하에 자본주의 국가건설론과 사회주의 국가건설론의 대립으로 이어졌고, 해방 후 그 대립이 세계적인 체제대립과 맞물리며 미처 타협·절충할 기회를 놓치면서 갈등이 폭발한 것이 6.25전쟁이라고 본다.


역사는 갈등 속에서 진보한다. 그러나 갈등이 곧 진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사회갈등을 직시하고 궁구하며 이를 해결할 능력을 그 국가와 사회가 스스로 갖출 때에야 비로소 진보할 수 있다. 그런 능력이 없다면 그 사회는 오히려 파멸할 따름이다. 그가 사회경제적 토대 분석을 중시하면서 동시에 이를 해결해나가는 다양한 갈래의 개혁론에 주목하는 소이이다. 그의 농업사는 농업기술, 토지제도, 농민, 지주경영, 사회변동, 모순구조를 해명하는 사회경제사 연구를 한 축으로 하고, 그 농업문제를 당대에 어떻게 고민하고 해결방안을 궁구했는지 밝혀내는 경제사상사 연구가 다른 한 축을 이룬다. 

 

내적 발전의 계기인 주체적 역량

 

1980년대 중후반에 집중된 농학사 연구는 그의 경제사상사 연구에서 백미라 하겠다. 그는 농사직설 등 조선 시기의 농서를 분석하면서, 저자들이 조선 농촌 안에서 자생적으로 축적된 고유한 농업기술, 농사 경험을 조사하고 정리하는 한편 중국의 앞선 농법을 연구하고 이를 풍토가 다른 조선 농촌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해온 지점에 주목했다. 내적 역량은 우물안 개구리처럼 지내서는 생기지 않으며, 외부 세상의 변화를 이해하고 그 장점을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능력을 갖출 때에 비로소 풍부해진다. 김용섭이 주목한 내적 발전의 계기는 이러한 주체적 역량을 말함이다. 


김용섭의 근현대 농업사 연구는 ‘근대화의 두 가지 길’이라는 용어로 집약된다. 김용섭은 근대화 과정에서 농업·농촌문제 해결의 방식 여하에 따라 그곳의 근대화 유형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한국에서는 지주가 산업자본가로 전환하는 지주적 근대화의 길과 농민이 시민의 주체로 성장하는 농민적 근대화의 길이 타협과 대립을 반복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근대국가 형성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유형을 농촌 질서 변화의 맥락에서 파악한 외국 학자로는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저자인 배링턴 무어를 들 수 있다. 배링턴 무어와 김용섭의 연구는 관점에서 많은 차이점을 보이지만, 두 연구를 비교해본다면 한국의 근현대사를 비교사적 맥락에서 파악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터이다.


김용섭의 농업사 연구는 식민지와 분단·전쟁의 비극을 경험한 해방세대가 그 문제들의 원인을 밝혀내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쌓아올린 거대한 학문적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그의 학문은 해방세대가 자신의 시대와 함께 고투한 지식의 역사인 셈이다. 그것이 곧 김용섭 학문의 역사성일 터이다. 아울러 그의 학문은 아직 분단의 문제와 정신적 식민주의 극복의 과제를 미해결상태로 두고 있는 오늘의 세대가 참고할만한 선행 업적이며, 한편으로 그 시대가 지녔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학문,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후학들이 극복해내야할 만만치 않은 두터운 벽인 셈이다. 그것이 그의 학문의 현재성일 터이다. 

 

 

 

 

김성보 연세대 교수·사학과

고 김용섭 교수의 지도 아래 「북한의 토지개혁과 농업협동화」로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국학연구원 원장이며,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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