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20:50 (금)
물에서 찾은 정치생태학...담론투쟁으로 갈등 피할 수 있나
물에서 찾은 정치생태학...담론투쟁으로 갈등 피할 수 있나
  • 김명식 진주교대
  • 승인 2004.03.0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본격서평 : 『세상을 움직이는 물』(이상헌 지음, 이매진刊, 2003)

▲ © 리브로
김명식 / 진주교대·윤리학

이상헌의 책은 이론과 실제 두 부분으로 이뤄져있다. 9장 '실천적 환경정의론의 모색'과 10장 '정치생태학서설'에서 정점을 이루는 이론적 논의를 통해 우리는 정치생태학의 윤곽을 잡을 수 있다. 百家爭鳴의 현기증 나는 이론들을 저자는 독자들이 알기 쉽게 일목요연하게 분류해주는 미덕을 발휘한다. 그를 통해 공리주의, 자유주의, 롤즈, 마르크스, 하버마스, 하비, 영, 쉬바, 에스코바, 고르, 리피에츠, 알트파터, 헤이워드, 오코너, 기든스, 벡, 드라이젝, 라투르 등 당대 이론들의 정치생태학적 함의가 투명하게 드러난다.

담론연합의 틀로 환경갈등 분석

전반부는 환경갈등의 실제를 다루고 있다. 나일강, 요르단강 등 국제적인 물분쟁에서 시작해 위천공단, 팔당호 등 우리나라의 물분쟁, 그리고 기상이변, 지구온난화, 세계물포럼 참관기 등 다양한 소재로 언뜻 보기에는 어수선하고 일관성도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저자의 문제의식은 일관돼 있다. 그것은 물로 상징되는 '환경갈등'이 '사회적 갈등'이라는 점을 보이고, 이에 대한 분석과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압권은 역시 7장 '위천국가산업단지 조성을 둘러싼 환경갈등의 담론분석'이다. 1989년 대구지역의 염색업체 공단이전 발표에서 시작해 근 15년을 끌어온 물 분쟁을 부산 경남권과 대구 경북권, 지자체와 일반시민, 환경단체와 시민단체들의 사회적 갈등으로 형상화해내고 있다.

이상헌은 환경정치를 담론정치로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계급의식이 정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계급의식을 생산하며, 이해관계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담론에 의해 구성된다. 환경갈등은 담론을 통해서 상이하게 환경을 구성하는 주체들이 자신들의 구성방식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연대해 상이한 구성방식을 갖고 있는 담론주체들과 대립하고 충돌하는 것이며, 담론연합을 형성해 다른 담론연합과 대치하는 것이다. 담론연합(discourse-coalition)이라는 틀은 마르크스주의적 틀로 설명할 수 없는 오늘날의 환경갈등을 동적으로 분석하는 데 유용해 보인다. 그에 따르면, 위천공단을 둘러싼 갈등은 다양한 행위자들이 경제적 이해관계와 가치관의 차이를 두고 싸우는 과정이며, 이 과정은 행정적 합리주의 담론, 생존과 성장 담론, 지속가능성담론, 녹색급진주의담론들이 다양한 쟁점에 따라 때로 투쟁하고, 때로 협력하는 대서사시다.

상황분석 명쾌하나 해법은 갸우뚱

그렇다면 환경갈등을 해소하는 방안과 전망은 무엇인가. 이상헌은 상황분석에서는 명쾌하지만, 아쉽게도 해법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평자가 보기에 이는 저자 자신이 두가지 관점에서 표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관점이 참여민주주의라면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주의다.

첫 번째 관점을 대변하는 저자의 해법은 담론들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해 상호보완과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합의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 시민단체의 노력, 그리고 지방자치의 활성화가 요구된다. 두 번째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에 가깝다. 다만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계급 대신 아이리스 영의 주변집단이 등장한다. 그것은 주변집단에 대한 권한부여전략을 통해, 이들을 환경운동의 주체로 나서게 도와주는 것이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크다. 전자의 경우 민주적 합의를 지향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담론투쟁을 지향한다. 계급투쟁의 자리에 담론투쟁이 들어선 것이다. 평자가 봤을 때 저자는 심정적으로 마르크스에 기울어져 있다. 하버마스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현실분석에서는 마르크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 점, 정치생태학의 필요조건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말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의 연계와 이데올로기 투쟁으로서 환경운동 전개를 주장한 것이 그렇다.

민주주의적 합의 모색에는 인색

그 결과 이상헌은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인색하다. 합의를 위한 민주주의적 노력을 '실용주의적 민주주의'로 폄하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는 마르크스와 현실사회주의가 범했던 잘못의 반복이다. 마르크스에서 민주주의는 '실질적'이지 못한 '형식적 민주주의'로 항상 비판의 대상이었고, 현실사회주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이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는 상당부분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진보도 민주적 절차를 준수할 때 의미있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해방이나 자연의 해방이라는 명분도 대중의 참여와 승인이 없다면 부질없는 짓이다. 민주주의가 모든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약하면 정치생태학의 필요조건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이다.

저자가 공언하듯이, 저자의 포부는 진보적 환경담론을 구성하는 것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반대담론인 성장담론 내지 행정적 합리주의담론으로부터 나올 법한 반론들을 별로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효율성의 문제이다. 우리는 오늘날 '사회적 합의'라는 의사결정의 실험을 통해 효율성의 상실을 경험하고 있다. 북한산, 방패장, 새만금 등 표류하고 있는 국책사업이 다 그렇다. 이를 다 행정편의적이고 중앙집중적인 의사결정의 탓이라고 방치해서는 안된다.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필자는 고려대에서 '환경윤리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민주주의와 환경', '생명복제와 심의적 의사결정',  '새만금과 심의적 의사결정' 등 환경문제에서 민주주의적 합의제도를 모색하는 논문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