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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나무' 언저리에 갇힌 건 아닌지…
'뿌리깊은 나무' 언저리에 갇힌 건 아닌지…
  • 김우룡 사진비평가
  • 승인 2004.03.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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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비평: 강운구의『시간의 빛』(문학동네 刊)을 읽고

완도 앞바다의 작은 섬들 사이로 해 뜰 때 배가 떠나고 질 때 돌아온다. 번쩍이던 빛이 놀빛으로 피었다가 사그라들며 하루가 저문다. 그렇게 한 해도 간다. 감회가 교차되는 엄숙한 시간은 언제나 짧다. © '시간의 빛', 248~249쪽.

 강운구는 사진가다. 최근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연이어 내고 있다. 이번에 나온 책은 사진 반 글 반의 에세이집 형태를 띠고 있어 사진만 실렸던 이전 것들에 비해 그의 생각과 발언을 알기에 더욱 쉽고 구체적이다. 강운구의 ‘시간의 빛’을 본다.
최근 이삼년 간 출판계의 작은 이변이라면 사진집의 약진을 들 수 있다. 사진집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진집의 출판은 여태껏 대개 초판 일이천부 이상의 판매를 넘지 못했다. 그것마저 자비 출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열악한 사진 출판 시장에 베스트셀러 사진집들의 출현은 우선 반가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즐겁지만은 않다.

길지 않은 사진사 가운데 우리에게 제법 잘 알려진 사진 전람회 중 ‘인간가족’展이란 게 있다. 1950년대에 처음 미국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기획된 이 사진전은 세계 수십 나라를 돌며 전시됐고 국내에서도 전시된 바 있는 유명한 것이다. 당시 그 미술관의 사진부장이었던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주도했던 이 전시회에 대해서는 두 종류의 평가가 있다. 인류 일반의 휴머니즘을 최고도로 농축시켜낸 사진전이라는 게 주류의 평가다. 그러나 엄존하는 폭력 속의 세계를 아름답게만 그려내 고통과 절망, 배반과 갈등의 현실을 사뭇 사상해버리는 역할을 하게 됐다는 평가 또한 존재한다. 나치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이 썼던 극적 효과를 노리는 전시 방법이 그대로 적용된 것 역시 이런 부정적 평가를 다시 음미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 어떤 사진 전람회보다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던 이 전시는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세상을 제대로 보게 하는데 도움이 됐을까. 아니면 오히려 세상의 문제를 피상적으로 보게 하고 가벼운 휴머니즘의 카타르시스를 통해 쉽게 잊고 가볍게 해소해버리는데 일조했을까. 오십년 전 기획됐던 ‘인간가족’전에서의 사진을 통한 이런 피상적인 현실 해소의 효과들이 오늘에 재현되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편치 않은 마음이 든다. 인문보다는 영화가, 문학보다는 만화가, 인간의 복잡한 내면보다는 삽화가, 좀 불편한 문자적 진실보다는 쉽고 편한 이미지적 공조가 대세가 돼버린 상업과 대중의 먼 벌판에, 한 뼘 자리를 차지하고 짐짓 다행의 표정을 감추고 있는 것으로 잘 팔리는 요즘의 사진집들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사진 출판의 약진을 보면서 새로우면서 견실한 그러면서도 대중에게 바로 다가가는 전달 방식을 찾는데 실패한 이십세기 시각예술의 자기모순을 지적한 에릭 홉스봄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강운구의 이번 사진집이 그가 이년 여에 걸쳐 모 주간지에 연재했던 사진과 글들을 모은 것임은 책을 받아들고서야 알았다. 강운구는 모두가 그렇게 알듯 우리시대의 중요한 사진가다. 사실 사진이란 것은 일견 너무 쉬운 예술 같아서 아무나 할 수 있는 듯 보이지만 제대로 잘 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모두가 글자를 쓸 수는 있되 명필이 흔치 않음과 같다. 세월과 마음의 공력이 따로 혹은 함께 집적될 때에 비로소 제대로 된 매듭들이 성취된다. 단순하기에 더욱 어렵다.

'스므나리'라는 마을 이름에 홀려서 횡성군 서원면의 골짜기로 찾아갔었다. 거기 윗 스므나리가 더 외진 마을이었다. 그곳 한 외딴 집의 소가 사진 찍는 것을 구경하며 물봉선을 한입 물었다. 한우들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안다. 가을 성찬, 꼴 지게에 가을이 실려왔다. © '시간의 빛', 134~136쪽.
사진이 그러한 것은 ‘지금 여기’의 것을 ‘그 때 거기’의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그 때 거기’의 것만이 ‘지금 여기’의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진의 복잡한 단순성을 말하면서 서양의 어느 철학자는 불교의 직지인심을 들춰내기도 했다. 사진에는 세상에 대한 증거가 찍혀 있지만 그것은 증거로서만 그치지 않고 스스로의 노래도 부른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이 증거와 노래라는 절벽 사이에 매달린 높은 줄 위에서 저만의 기술을 통해 양 쪽을 넘나들어야 하는 어려움을 스스로의 숙명으로 받아들여 산다. 강운구 역시 그렇다. 1970년대의 해직 기자시절부터 오늘의 이 책에서까지 그런 쉽지 않은 줄타기의 모습이 읽힌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그 줄타기가 동반하는 불안의 강도와 괴로움의 깊이다.

책에는 모두 여든아홉 점의 컬러 사진과 마흔 한 편의 글이 실려 있다. 거의 처음으로 보게 되는 강운구의 글 묶음은 이 사진가를 받치고 있는 인문적 소양의 두터움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사진과 글 모두 무척 아름답다. 높은 산에 도적놈 장물처럼 숨겨둔 쓰레기더미조차 그의 손을 거치면 아름다운 사진이 된다.

이 아름다운 사진집을 제대로 읽기 위해 필요한 우리의 독법은 어쩌면 반어법에 대한 이해일지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를 이해하기 위한 독법일 수도 있다. 스스로의 무게에 의해 고통스럽지 않은 진정한 반어법은 없다. 그런 반어법은 1930년대의 독일 사람들의 얼굴을 미련할 정도로 많이 찍어 제 사는 시대를 드러내고자 했던 쾰른의 사진관 주인 아우구스트 잔더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모든 사진은 ‘지금 여기’를 사는 인간의 이해에 보다 제대로 근접하게 할 때에만 읽힐 가치가 있다. 그런 면에서는 여전히 ‘뿌리깊은 나무’의 언저리에 갇혀 있는 이번의 강운구의 사진들은 아쉽다. “선택할 수 있다면 끝까지 철 안 드는 쪽을 택하고 싶다”는 그의 말을 듣는 것은 정말 기분 좋다. 다시 늘 청청하게 젊은이의 철없음 쪽으로 회귀하는 그의 사진을 보고 싶다.

김우룡/ 사진비평가 .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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