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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略號의 거리
문화비평: 略號의 거리
  • 김영민 한일장신대 철학
  • 승인 2004.02.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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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땀처럼 생생하다. 1980년 5월의 ‘정론지’들이 체제와의 거리(距離)를 잃어버리자, 유인물들과 소문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거리의 핏빛에 등을 돌린 신문들은 하나같이 체제와의 距離를 좁히며 하아얗게 탈색돼갔다.

距離를 잃은 정론지들의 변명은 체제 그 자체로 회귀하지만, 체제는 자신을 위한 변명도 이데올로기도 신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 동어반복의 거울상으로 더럽게 빛났다. 거리를 삼켜버린 略號의 매체, 그리고 그 매체를 삼켜버린 체제는 제 스스로 완벽하고 全포괄적인 알리바이이기 때문이다.

거리와 체제 사이의 낡은 변증법이 통하던 시대에 대한 향수마저도 향수의 문화산업 속으로 재체계화됐다. 距離도 향수도, 미소도 초월도 약호로 처리된 채 상품으로 둔갑했다. 그리하여, 체제와 사통하던 매체와 열불나게 싸우던 거리의 시대는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다. 사실, 거리가 없어진 것이 아니다; 거리들은 그 어느 때보다 번흥하고 왕성하다.

요점은 ‘거리의 距離’가 없어진 것이다. 자본과 소비와 욕망과 정보와 이미지의 파편들이 범람하는 우리의 거리 속에서 距離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성찰의 거리의 距離, 비판의 거리의 距離, 대화의 거리의 距離, 그리고 人紋의 거리의 距離가 꾸준하고 돌이킬 수 없이 폐색하거나 함몰하고 있는 것이다.

거리의 距離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는 약호들이 들뜬다. 지나치게 들뜬 약호들은 제 힘에 못이겨 힘껏 간통하고 강간한다.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의 천재 李箱과 더불어, 20세기의 인문사회과학자들은 입을 모아 “人紋의 뇌수를 소각시키는” 약호의 폭력을 경고한 바 있다.

계몽의 변증법, 그 이성의 명암은 약호들의 삶 속에서 극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우리들은 이미 약호의 체제와 질서를 내면화시켰으며, 그 기질과 성향을 육체화 시켰고, 그 폭력과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법을 익혔다. 체제의 큰 평화 아래에는 작은 폭력의 체질화라는 시대의 상처가 복류하고 있다.

거리의 距離가 약호의 이데올로기와 물신주의를 내파하고 저지해주던 시대는 바야흐로 끝나고 있다. 이미 거리의 풍경은 약호로 넘실거리고, 약호는 거리의 체계를 통합시키는 유일한 單子가 되었다. 距離를 잃은 거리들이 더 이상 인문주의의 샘터와 현장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고향이 사라지고 출생지만 남아 있듯이, 距離없는 거리들만 도처에서 약호의 길을 만들고 있다.

물론, 벤야민이 ‘도시적 허위의식의 지치지 않는 대리인’이라고 명명했던 유행은 이 약호의 길, 그 표면의 배치를 선도한다. 유행은 신기함에 의해서 자멸해가는 신기함의 체계인데, 질긴 사유와 인문적 실천을 근원적으로 배제하는 템포와 물매를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유행이라는 浮薄의 패턴을 문화라고 인준하며, 묘사하고, 분석하며, 경배한다.

허울좋은 문화들은 유행의 코드를 중심으로 쉼없이 회전하고, 유행은 반철학과 무자아의 시대와 야합하는 마지막 형이상학으로 군림하고 있다. 유행은 그 나름의 신지(神智, fad-gnosis)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필시 이후의 인문학은 약호화 된 거리들을 묘사하는 글들이 끝나는 자리에서 다시 시작돼야 할 것이다. 약호 체계의 묘사와 기술이 은폐한 서사와 영혼의 내력을 역추적하고 豫示하는 일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문화비평이라는 글들이 距離를 잃은 거리들과 그 약호체계들을 묘사하다가 지친 바로 그 자리에서 인문학의 새로운 길은 열릴 것이다.

距離없는 거리들의 약호체계를 ‘풀어-버리는’ 지점에서부터 인문학의 새로운 서사는 그 전래의 극진함을 다시 열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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