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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당신의 연말은 私通인가?
문화비평: 당신의 연말은 私通인가?
  • 김영민 한일장신대
  • 승인 2003.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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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李瀷,1681~1763)은 ‘星湖僿說’(1740)에서 國弊와 民困을 모두 뇌물의 탓으로 돌렸으니, 이 폐습의 기세가 손에 잡힐 듯하다. 덧붙여, ‘조선은 人情이 있는 나라’라는 중국인들의 인사는 모두 뇌물을 가리킨다고 따갑게 꼬집기조차 한다. 뇌물이라는 私通이 동서고금을 통해 상향식이라는 사실은 한결같으니, 그것을 인정에 빗대는 일은 아무래도 사리에 맞지 않고 오히려 非情한 면이 적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이 이용후생의 실학자는 情理의 저변에 무의식화 된 제도 이데올로기를 소박하게나마 적시했을 법도 하다.

권력의 징후로서의 受賂는 지금도 심심찮게 보도되곤 하지만, 그 방식은 17~18세기와 판이할 것이다. 이 첨단의 기술정보 시대에도 ‘사과상자’를 매개로 검은 돈이 건네지곤 한다지만, 필시 접촉을 피하고 접속의 매듭을 교란시키는 복합매개의 방식이 주로 이용될 것이다. 접속과 매개의 장치가 교묘해질수록 人情은 그 기계적 장치 속에 함몰되는 법이니, 뇌물의 이치를 人情에 얹으려는 짓은 아무래도 非情이다. 그렇다면, 명절이나 연말연시를 틈타 마치 干滿처럼 오가는 선물은 대체 어떤 인정이고, 또 어떤 비정인가.

뇌물과 선물의 경계나 그 층차를 말끔히 규정할 수는 없지만, 선물의 文化는 뇌물의 文禍가 기생하는 숙주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익의 지적처럼 ‘뇌물은 우리나라의 오랜 병증’이라면, 이 병증의 토양이 곧 인정주의를 알리바이로 내세우는 ‘선물의 문화’일 것이다. 선물과 뇌물은 유기적으로 결부한 채 복류하다가, 필요나 강요에 따라 검은 뇌물이 되기도 하고 선물로 둔갑해서 하얗게 웃기도 한다.

情理와 合理 사이의 기울기나 公私의 변별에 의해서 良俗으로서의 선물과 폐습으로서의 뇌물을 차별할 수 있겠지만, 이 분법은 자주 흐릿하다. 시속과 인정을 무시하는 합리주의에도 부작용이 없지 않고, 公利와 절도를 팽개치는 인정주의 역시 정실과 부패의 온상일 터, 내내 時中이 토론될 수 있는 성숙한 ‘교환의 문화’가 절실하다. 이 교환 속의 情理는 구조화된 뇌물/선물의 연고주의와는 달라야 한다. 그것은 ‘합리와 함께/합리를 넘어가는’ 호혜적 융통의 扶助 시스템이 유지할 인간적 끝마무리, 혹은 그 아우라와 같은 것이리라.

잘 알려진대로, ‘증여론’(1925)의 모스(M. Mauss)는 바로 이 ‘호혜성’과 ‘교환’의 개념을 축으로 포틀래치(potlach), 쿨라(kula), 하우(hau) 등, 증여라는 사회적 교환와 결속, 그리고 조화의 과정을 분석한 바 있다. 모스의 인류학적 탐색은 ‘절제있는 고귀한 지출(depense noble)의 문화’라는 매우 흥미로운 경제 윤리적 결론으로 집약된다. 그리고 이 문화 속의 부자들은 의무적/자발적으로 공동체 전체의 회계원 노릇을 하게 된다.

이로써 인색과 낭비, 개인주의와 공산주의, 비정과 선량 등의 이분법을 슬기롭게 지양하는 호혜적 교환의 경제문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스는 절제 있는 고귀한 지출을 공동체적 결속의 기본으로 여기는데, 이 기본의 사회적 훈련과 장치를 통해 뇌물이라는 수직적 私通의 연계를 수평적 선물의 호혜교환의 문화로 승화시킬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당신의 연말은 사통인가, 호혜교환인가, 아니면 그저 건조한 평형이신가?)

김영민 / 한일장신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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