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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에 갇힌 글쓰기...탈형식 학술무크지 등장
각주에 갇힌 글쓰기...탈형식 학술무크지 등장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11.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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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학계의 禁忌를 찾아서③ : 논문형식의 실험

학문의 탈식민성을 논할 때 화제의 중심에 오는 것이 논문의 형식이다. 학계의 지나친 형식집착증이 정신의 서구의존성을 가려주고 학자들을 매너리즘에 빠지게 해 결국 삶에서 겉돌고 헛도는 무익한 논문들을 양산해낸다는 비판은 계속 제기돼왔다.

하지만 새로운 형식이나 글쓰기의 모색은 쉽지 않다. 형식을 건드리는 것은 여전히 금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섣불리 튀었다가는 기본이 안돼 있다는 소리를 들을 뿐 아니라, 학술지 게재문제부터 시작해 업적평가까지 일련의 피해를 보기 십상이다.

새로운 글쓰기를 가로막는 금기들

가령 역사학계에서 이단아로 소문이 난 김현식 한양대 교수는 소설적 기법을 역사서술에 끌어들이고 있는데, 얼마 전 ‘서양사학회’에 논문을 기고했다가, 에세이 코너로 밀려서 게재됐다. 리뷰 아티클의 틀을 너무 많이 벗어났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학술진흥재단의 등재(후보)지 평가제도가 만인의 관심사로 떠오른 지금 ‘알아서 기며’ 딱딱 형식을 맞추는 것이 제 1의 과제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논문을 완성하느라 머리털이 곤두선 연구자들은 줄간격 맞추고 글자 포인트 조정하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기상 외국어대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이 교수가 이끄는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은 얼마 전 갈림길에 섰다. 2년간 학회지 발간을 지원해준 출판사와의 계약이 만료돼 학회지 ‘사이’의 차후 출간이 불안정 국면에 접어든 것.

이참에 등재지를 노리고 논문성을 강화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학진 휘하의 학회지들이 펼치는 논문유치 경쟁과, 엄격한 심사요건을 만족시키기 위한 각종 편법행위를 목격하고는 입맛이 딱 떨어졌다. ‘우리말 모임’의 애초 취지도 있는지라 제도권은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내놓은 대안은 단행본 무크지로 학회지를 기획해나가자는 것. 다음 호에서는 ‘현대의 신화’를 주제로 논문들을 모아서 책으로 묶어낼 예정이다. 학회지로 내면 5백부도 채 안 팔리지만, ‘우리말 학문’에 대한 세간의 관심사로 볼 때 단행본으로 잘만 만들면 1천부 이상은 팔리지 않겠느냐는 충고를 받아들인 것. 이런 무크지 움직임은 꽤 여러 곳에서 시작되고 있다.

학계의 정형화된 논문글쓰기에 대한 개혁적 움직임에 학진이 찬물을 끼얹은 감은 있지만, 최근 학진은 이런 불만을 수렴, 학계 중진들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논문의 질적 평가방안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해결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

문제는 논문의 좀더 내재적인 형식, 이를테면 논문의 구성, 문체, 참고문헌 등 내용과 직결되는 형식들에 대한 분과학문별 입장이 예전보다 유연해졌는가다. 대표적인 것이 인용자료에 대한 규제다.

인도의 서발턴 연구집단과의 연계 아래에서 탈식민주의 역사학을 모색하는 ‘트랜스토리아’는 현재 2호를 펴냈다. 이곳 멤버인 배성준 서울대 강사는 “역사학에서는 아직 증언이나 문학작품을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라며 불만을 털어놓는다.

민중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은 민족지적 방법을 다양하게 시도해야 하는데 아직 어렵다는 것.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도 별로 없고, 그 반대로 있는 그대로 단절을 보여줘야 하는 부분도 ‘인과적’ 서술이라는 벽에 막힌다”라고 덧붙인다.

최병두 대구대 교수(지리학)는 지리학계가 형식이 많이 자유로워졌다고 하면서도 가설과 검증을 통한 실증적 논문은 원고지 80매 정도로 양을 제한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럴 경우 수학적인 검증 말고는 별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공간이 생기지 않는다.

이도흠 한양대 교수(국문학)는 요즘 석사논문 쓰는 학생들은 “연구사 검토하고 정리하는 데 90을 쏟고 자기 얘기에는 10을 채 못쏟는다"라고 지적한다. 물론 석사논문을 쓸 때는 이 과정이 필요하지만 너무 얽어매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이런 타인 학설의 정리와 주석이 박사논문은 물론이고, 평생을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서들도 못알아 듣는 업계용어로 도배된 문헌정보학계의 비현실적인 논문관행에 대한 김정근 부산대 교수의 경험적 분석을 통해 잘 알려진 바 있다.

기행문 같은 논문을 수록한 미학권위지

학술대회에 발표되는 논문들은 현장에서 요령있게 뜻을 전달하고 토론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 학술대회에서는 천편일률적 형식으로 논문을 읽고 끝낸다. 이는 발표방식에도 문제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논문형식이 문제다.

발표를 잘 하려면 논문에 높임말도 쓸수 있고, 인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때로 대담형식을 취하는 등 여러가지 시도가 필요한데 이런 것은 획일적 스타일에 물든 학자사회에서 시도조차 되지 않고 있다. 알고도 고치지 못하는 병인 셈이다.

잠깐 바깥을 내다보자. 해외의 경우 유럽과 미국은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프랑스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돌아온 신항식 홍익대 교수는 30년 이상 학술적 권위를 얻어온 몇몇 학술지의 사례를 들어준다.

그에 따르면 학술지의 성격에만 맞으면 형식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 학회는 대부분 대학지원을 받는지라 학자들은 학술지 비용만 부담하면 돼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신 교수는 “남의 학설을 발전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불쾌하다”며 논문형식주의에 가린 학계의 보수성을 지적한다.

미국은 유럽과 달리 논문형식에 대해 매우 보수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1960년대 네오콘들의 학계 길들이기를 위한 코스워크 강화와 엄정한 심사제도가 큰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나와 있다.

미학권위지인 ‘어메리칸 저널 오브 에스쎄틱스’(American Journal of aesthetics)는 헤겔과 맑시즘적 미학이론에 대해 매우 배척적인 걸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잡지 2000년 겨울호에 칸트와 맑스 미학의 종합을 꽃이 핀 호수길을 걸어가며 사색하는 기행문 같은 논문이 실렸다. 그 한 대목을 인용해보자.

"나는 미니애폴리스 시의 여러 호수 가운데 한 호숫가에 서 있다. 키가 크고 보라빛이 나는 꽃이 물가를 밝히고 있다. 나는 이 식물이 (보라빛의 고삐 풀린 경쟁자란 뜻을 가진) 퍼플 루즈 스트라이프이며 몇 해전에 외국에서 수입된 외래종의 꽃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이 식물은 뿌리를 내리는 지역을 뒤덮어버리는 경향이 있어 그냥 내버려두면 물을 정화하고 너른 땅의 식물과 야생동물을 먹여 살리는 데 너무도 중요한 연약한 생태계를 급속도로 파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이것이 위험하며 사악하기조차 한 식물이라고 본다. 도시조경사인 내 친구는 그녀의 사무실 문에 이 식물을 퇴치하자는 포스터를 내걸고 있다. 그녀는 나에게 이 식물이 위험하며 혐오감이 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호숫가에 서서 그 보랏빛 꽃들이 늪지의 다소 단조로운 색감과 배경을 이루어 그토록 눈부시게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아름답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이도흠 번역)

각주도 참고문헌도 없이 오직 자신의 경험을 전거 삼아서 펼쳐낸 글이지만, 합리적이고 설득력도 강해 이 글은 학계에 긴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중국은 대학학제가 업적중심으로 개편되면서 논문형식도 점점 자유로운 에세이풍에서 미국식으로 엄격하게 바뀌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하도형 고려대 강사(정치학)는 “최근 중국학계를 달군 문제의 논문들은 모두 에세이풍의 글이었다”고 말한다.

사서삼경이나 왠만한 고문헌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는 중국 인문학자들의 경우에는 각주를 다는 것이 불필요할 정도로 귀찮은 일일 뿐이라는 게 그의 추가설명이다. 그런데 최근 연변의 학자들과 연합학술지를 낸 한 국내학술지 편집자들은 한 연변학자의 논문이 ‘에세이 같다’면서 그 수준을 의심했다고 하는데, 과연 이런 것은 문화상대주의에서 접근해야 되는 게 아닐까.

엄격한 형식주의는 학술지들의 표정을 모노톤으로 바꾸고 풍성함을 사라지게 한다. 얼마 전 ‘모색’이라는 잡지에서 조사한 결과 최근 몇 년간 국내 학술지에서 기획특집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엄격한 형식을 추구하다보니 자유로운 발상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이 좁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와 이를 소화하기 위한 학제적 연구도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논문의 분과적 규범은 최소주의의 지혜를 택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한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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