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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새해 이야기’ : 새해의 12가지 바람
정세근 교수의 ‘새해 이야기’ : 새해의 12가지 바람
  • 교수신문
  • 승인 2020.01.0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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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새해에는 ‘새해에는’이라는 말을 안 해보고 넘어가고 싶지만 또 마찬가지다. 새해에도 여전히 ‘새해에는’이다. 제발 새해에 빈다. 다음 해에는 ‘새해에는’이라고 말하지 않도록 해주십사.

그래도 우리는 ‘새해’를 말하고 또 새로운 한 해를 그릴 것이다. 새해에는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 말고, 무엇을 어떻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안 되는 것인가? 긍정보다는 부정의 변증법이 더 낳은 것 아닌가? 긍정의 신화보다는 부정의 과학이 더 어울리는 것은 아닌가? 신화는 엉뚱하더라도 친근한 설명이라면, 과학은 이성적이더라도 정감 없는 설명이 아니던가? 

포퍼의 선언을 빌린다.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라.’ 오래되었지만 나를 사변적 사고에 빠지지 말도록 지탱해준 문장이다.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은 얼마나 말하기 쉬웠던가. 그러나 내 주위의 술 취한 노동자, 말 안 통하는 농민, 냄새나는 도시빈민은 얼마나 참기 어려웠던가. 그래서 구체적이어야만 하고, 그래서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를 맡아야 하고, 그래서 관념의 위험성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래서 거짓부렁의 철학과는 거리를 두어야 하고, 그래서 참다운 역사와 외도해야 하고, 그래서 높낮이 없고 위아래 없이 사람들과 가까워져야 했다. 넓은 여행보다 깊은 여행을 꿈꾸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이제 또 좋든 싫든 한 해를 시작해야 한다. 낮게, 얕게, 가볍게 바라본다. 

1월에는 아무것도 마음먹게 하지 말게 하소서. 움츠러든 몸뚱이를 일으켜 세우기도 힘든 시절, 그냥 내버려 두소서. 힘든 육체를 쉬게 하고, 아등바등하지 않게 하소서. 운 좋게 따뜻한 아랫목이 있다면 그곳에서 떠나지 않게 하소서. 그래서 내가 추우면 남도 추울 것이라는 동정심을 지킬 수 있도록 하소서.

2월에는 봄이 오리라는 믿음을 저버리게 하지 마소서. 역사가 나를 속여도, 사람이 나를 등져도 봄만큼은 내 앞에 나타날 것을 믿게 하소서. 동장군(冬將軍)이 아무리 매서워도 춘몽(春夢) 앞에 녹아들 것임을 기다리게 하소서. 기다릴 용기를 주고, 믿을 아량을 주소서. 인류에게 봄이 오리라는 희망을 품게 하소서. 

3월에는 파릇파릇한 새싹이 사라질 때 사라지더라도 내 눈앞에서 여린 녹색이 조금이라도 더디게 떠나도록 하소서. 솜털같이 불어 오르는 초목의 연록 수염을 만지도록 하소서. 늙어 굵어진 터럭이 아닌 새롭게 태어난 아기의 솜털처럼 새싹들이 바람에 휘날리게 하소서. 

4월에는 나물이라도 몇 점 따게 해주소서. 냉이가 귀하면 쑥이라도 내 눈에 띄게 하소서. 냇가에 나는 돌미나리라도 얻어먹게 하소서. 뿌리째 뽑아 가면 내년에 나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농민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잘라갈 수 있도록 하소서. 그것이 고급스럽다면 민들레라도 뜯게 해주소서. 지천으로 널린 민들레로 쌈이라도 싸 먹도록 해주소서. 

5월에는 더 이상 춥지 않은 강바람을 쐬게 해주소서. 모래 위에서 잔뜩 데워진 햇볕으로 나의 생기를 되살려주소서. 바닷가 백사장에서 바다 비린내를 품고 불어오는 해풍은 바라지도 않나이다. 차지 않은 바람으로 나의 살결을 어루만져주소서. 행운이 온다면, 그 바람 속에서 한잠 들게 하소서. 

6월에는 6.10 항쟁의 ‘화장지 눈’이 다시 한번 도시 빌딩 숲 사이로 하얗게 하얗게 내리도록 하소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겠지만, 눈물 콧물 흘리는 시위대를 위해서 건물 위에서 뿌려주던 그 축복을 남녀노소 없이 다시 한 번 경험하게 하소서. 6월 10일 12시에는 티슈 페스티벌을 자동차 경적과 함께 누리도록 해주소서. 유월이 거친 ‘육월’이 아닌 부드러운 ‘유월’로 영원히 남을 수 있도록 하소서. 

7월에는 찬물에 머리 감게 하소서. 7월은 우리력 6월 15일 유둣날이 있는 달이지요.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 날(東流水頭沐浴)에 계곡이나 폭포를 찾을 수 없으면 집에서라도 찬물에 머리 감으렵니다. 유두잔치를 실컷 벌이면서 여름을 앞두고 물맞이하도록 해주소서. 더위 먹지 않도록 제를 올리겠나이다. 

8월에는 별을 바라보게 하소서. 견우와 직녀가 까막까치들이 낳은 다리 오작교에서 만나는 칠석(七夕)날에 연중 가장 밝게 빛날 은하수를 기다리겠나이다. 하늘에 흐르는 별의 냇물인 은하(銀河) 속에서 사랑을 찾고, 만남을 이루고, 헤어짐을 견뎌내게 해주소서. 그땐 바쁜 일을 끝낸 머슴들이 호사롭게 호미씻이를 했듯이, 노동자들에게 하룻밤이라도 별을 보며 쉬게 해주소서. 

9월에는 학생들의 개학이 다시는 연기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날씨 때문이라도, 핵발전소 때문이라도, 시위 때문이라도, 쿠데타 때문이라도 세계의 모든 학교의 개학이 늦춰지는 일이 없도록 해주소서. 하다못해 돈 때문에라도 스스로 개학을 늦추는 일은 없도록 해주소서. 

10월에는 자랑스러운 한글날을 이틀 놀도록 해주소서. 본디 공휴일(1949)이었던 한글날이 64년이나 지나 공휴일이 된 것을 뉘우치도록 앞으로 64년 동안은 이틀 연휴가 되도록 해주소서. 10월 9일 한글날 하루, 10월 10일 가갸날 하루 이렇게 놀도록 하소서. 가갸날이라는 말이 먼저(1926)니 10월 8일을 한글날 이브로 삼아도 좋겠나이다. 

11월에는 만물이 옷을 벗듯 나도 옷을 벗게 하소서. 욕심의 옷, 만용의 옷, 차별의 옷, 명예의 옷, 권력의 옷, 가식의 옷, 미움의 옷, 입지 않아도 될 모든 옷을 벗게 하소서. 

12월에는 경술국치일만큼이나 1212 군사 반란을 기억도록 하소서. 국경을 지켜야 할 군대가 국경을 비우고 도심으로 들어온 일, 국군끼리 교전하여 살상이 벌어진 일, 이로 인해 1980년 계엄 아래 광주의 비극이 일어난 일을 잊지 말도록 하소서. 역사는 기억하는 자들에게만 역사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소서.

우리 동네에는 전국의 쓰레기가 다 모인다. 그 일로 지역이 시끄럽다. 공해보다 암이 급증한 것이 더 이슈가 되었다. 그전에는 전국의 생수 공장이 다 들어서 물이 마르고 땅이 꺼졌다. 요즘에는 제주의 고유정과 화성의 이춘재가 이곳 청주에서 자리 잡은 것을 두고 그 까닭을 묻는다. 겉만 보는 보수성도, 애매한 포용성도, 분명하지 않은 발음도 문제로 떠오른다. 아무리 그래도 좋지만, 새해에는 거듭 발생하는 네 모녀 자살사건 같은 것만큼은 사라져야 하겠다. 국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해도, 배고프고 잘 곳 없는 힘없는 국민을 먹여주고 재워주어 힘을 찾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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