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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모임을 찾아서 2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모임을 찾아서 2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3.09.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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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다시 쓰는 세계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이하 여이연, 공동대표 이수자 성신여대 교수, 임옥희 경희대 강사)는 혜화동 먹자골목 사이, 낡은 건물 꼭대기층에 자리잡고 있다. 각종 술집이며 상가가 집합해 있는 그 거리에 연구소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외부학계와 페미니즘이 아직 접점을 찾지 못한 현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 것도 이 때문이리라.

여이연이 문을 연 때는 1997년 11월. 고갑희 한신대 교수(영문학)를 중심으로, "여성의 역사를 다시 쓰고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새로운 시대의 이론적 패러다임을 만들자"라는 기조 아래 제도권 안팎의 여성연구자들이 모였다. 초기에는 인문학 연구자들이 주축을 이뤘으나, 점차 사회과학 연구자들도 흡수했으며 현재 소속된 연구원만 50여 명이 넘는다.

여이연이 '문화이론' 연구를 표방하고 나선 것은 기존의 페미니즘 학계에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전의 활동이 대부분 여성노동문제에 한정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론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문화전반의 여성주의적 사고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여이연의 출발은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여기서 '문화'는 광범위한 차원의 문화를 의미한다. 문화 전반에 여성주의적 사고를 알리는, 기본부터 서서히 바꿔나가는 시도이기에 이들의 작업이 오랜 기간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여성학 강좌가 시작된 지 25여 년이 지나는 동안 페미니즘 진영도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여성노동자 연구를 하던 초창기에서 지금은 '문화'를 화두로 놓고 있는 것. 한동안은 이론적 작업을 한다는 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논의를 하는 것이 아닌지 내부의 의견도 분분했지만, 이제는 현장활동가들이 이론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이론과 실천의 관계가 점차 명확해 진다는 것이 이들이 느끼는 변화 중 하나이다.

그러나 여전히 페미니즘은 주류 담론으로서의 위치를 획득하지는 못했다. 또한 페미니즘이 여성 일부만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이에 임옥희 교수는 "주류학계에 편입하는 것이 여성주의의 목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세상을 보는 하나의 시각을 연구하면서 주변부를 끌어안자는 것이지, 또 다른 권력이 되기는 바라지 않는다는 것.

이들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세미나와 강좌 개최와 '여/성이론' 출간이다. 여성이라는 현재의 정체성을 만든 역사에 균열과 틈새를 내겠다는 의미에서 이 책의 제호 '여'와 '성' 사이에 빗금(/)을 그었다. 지금까지의 여성에 틈새를 내는 여/성의 이론을 만들고,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문화 경제 정치를 바라보는 장을 열기 위해서였다. 세미나의 결과물은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뫼비우스 띠로서 몸' '다른 세상에서' '정신분석과 페미니즘' 등이 그간의 결과물이다. 임 교수가 주축이 돼 펴낸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은 이번에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여느 사회과학에서도 제기되는 질문이지만, 페미니즘 연구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서구 이론 의존적이지 않느냐는 비판이 있다. 이에 이수자 교수는 "세미나를 통해 먼저 여성주의 이론을 시작한 사람들의 연구를 공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현실과 비교하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는 설명했다. 한편으로는 국내 페미니스트 지식생산에 대한 토론의 장을 준비하고 있다. 올 가을부터 연구원 전체가 참가하는 세미나를 열고, 그 결과물을 내년 봄에 출간할 '여/성이론' 10호에 담을 계획.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여이연 연구자들 중에 아직 남성연구자들이 없다. 여성으로서의 체험이 페미니즘 연구를 하게 만드는 동기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한계가 있다는 것. 가부장문화 전반의 변화 없이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멀지 않는 미래에 연구소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여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지영 기자 jiyou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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