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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23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23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3.07.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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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 돈 워싱턴에서의 침묵의 강연

▲워싱턴에서 어느날 기념 사진을 찍다. 왼쪽부터 박찬모, 김용준, 함석헌 ©

 

정확한 날짜는 잊었지만 1962년 1월 말에 나는 미국의 수도 워싱톤 디·씨의 국제 공항인 벌티모아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현재 포항공과대학교 총장 대리로 있는 박찬모 교수가 공항에서 나를 맞이해 주었고 생각지도 않게 일년 전에 텍사스 주립여자대학교에 유학 중이던 누이가 벌티모아 공항에 나와 있는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텍사스주 달라스시에서 벌티모아까지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사흘 밤낮을 달려 오라비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다.

함 선생님이 원하셨던 대로 선생님과의 동행은 성립되지 않았다. 나는 명색이 공무원 출장이었고 함 선생님의 비자 발급이 늦어지는데 나의 출발일자를 맞출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함 선생님은 아마 한 달이 훨씬 지난 다음에야 워싱톤 디·씨에 도착하였다. 숙소는 퀘이커의 프렌드쉽 하우스였다. 미국에 오셔서도 한국에 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한복 차림이었다. 지난번 선생님과 안병무 박사와의 대담 때 하신 말씀과는 좀 상치되지만 선생님이 한국을 떠나실 때부터 이미 미국 국무성 초청 케이스로 방미의 길에 오르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처음에는 퀘이커 초청으로 여권수속을 밟으셨지만 비자가 늦어지는 동안에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의 문정관이었던 그레고리 핸더슨씨가 선생님의 '5·16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 국무성에 보고하는 바람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국가에서 이와 같은 언론자유가 허락되었다는 사실이 도리어 높이 평가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함 선생님께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을 3개월간 시찰하시도록 주선되었고 3개월간 시찰하시는 동안에는 하루에 퍼·디엠을 20불씩 받으시며 통역까지 대동할 수 있는 말하자면 대단히 후한 대접을 받는 케이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여하튼 워싱톤에 도착하자마자 미국정부 국무성 한국과장을 만나셨고 그 자리에서 한국과장이 "어떻습니까? 군사정부는 잘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네,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짧게 대꾸하셨을 뿐 더 이상 아무런 말이 없었다는 풍문이 한국인 교포사회에 떠돌았다.

당시 워싱톤 디·씨는 마치 한국 장성들의 망명지와 같은 느낌이었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였기 때문에 군에서 밀려난 장성들이 전부 이곳에 몰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지금 나의 뇌리에는 최영 장군 및 최경록 장군이 기억으로 남아있다. 최경록 장군은 장면정권 때 참모총장하던 사람 아닌가. 어떻든 한국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군사 쿠데타의 지도자였던 박정희 소장은 화제의 중심인물이었고 그에 대한 비난은 이루 입에 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최경록 장군은 비교적 입이 무거운 편이었지만 최영 장군은 대단히 발발하다 할까 박정희 소장에 대한 비난도 가장 많이 입에 담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하루는 함 선생님이 화제에 올라 최영 장군이 그 늙은이는 도대체 에티켓이 없는 주책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기에 이에 응수하여 그와 말다툼한 기억이 남아있다. 함 선생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사람 같았다. 에티켓이 없다고 한 것은 여럿이 모여 있는데 서슴없이 저고리를 벗어서 그 집 주부에게 동정을 갈아달라는 버르장머리가 없는 늙은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와의 말다툼을 길게 늘어놓을 마음은 없지만 그렇게 경솔하게 입방아를 찧던 그 장군님이 한 달이 못되서 박정희 소장이 자기를 불렀다고 좋아하고 귀국하는 모습에 나는 어이가 없던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 최경록 장군은 한 2년은 족히 버티다가 영국대사로 임명되었다.

이와 같은 판국이나 함 선생님의 사상계지의 글은 워싱톤 교포사회에서는 화제중의 화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함석헌이가 군사정부는 잘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에 잘하고 있다고 대답했다는 소문은 야릇한 뉘앙스를 풍기면서 교포사회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3개월간이 미국시찰을 마치시고 워싱톤 디·씨로 돌아오신 함 선생님은 미국 국무성의 초청기간이 만료된 다음에는 한 스무날 동안 나의 아파트에 계시겠다는 말씀이 있었다. 나의 평생에 선생님 모시고 거의 스무날을 보낼 수 있었던 일은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나는 홍종희(당시 국립공업연구소 연구관으로 현재는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명예교수)님과 같이 워싱톤 디·씨 동물원 뒤쪽의 라몬트 스트리트에 있는 아파트를 빌려 자취하고 있었는데 우리 아파트로 오신다니 홍종희 씨와 내가 같은 방을 쓰고 선생님께 방 하나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선생님의 생활을 엿보게 되었는데 우선 선생님은 밤에 잠을 주무시는 것은 분명한데 새벽에는 언제 이어나시는지 선생님보다 먼저 일어나 보겠다고 여러 번 별러 봤지만 번번이 허사였다. 일찍 일어난다고 일어나서 선생님 방을 살짝 들여다보면 벌써 아침 소세 다 마치시고 의자 위에 무릎꿇고 정좌하시고 노자책을 읽고 계셨다. 당시 이미 一日一食하시는 때라 서툰 솜씨로 저녁을 지어 드렸지만 내 솜씨에 음식이 오죽 했겠는가. 워싱톤에도 부부가 가정을 이루고 선생님을 모시고자 하는 가정이 많았지만 선생님이 굳이 나의 아파트를 택하신 것은 전에 있었던 사건에 대한 조심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 됐지만 선생님께 여쭈어 보지는 않았다.

어느날 나는 객원연구원으로 있었던 표준 연구소에서 일찍 퇴근하여 아파트에 들렸더니 선생님께서 텔레비전을 보고 계시다가 하시는 말씀이 지금까지 기회있을 때마다 공부 안 한다고 야단만 쳤는데 아닌게 아니라 여기서는 시집장가라도 가서 서로 마주보기라도 하구 살아야겠는데 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루종일 너무 무료하셨던가 죄송스러운 마음이 앞섰지만 함 선생님께서 나에게 사람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단 한번 있었던 말씀이어서 나의 기억에 생생이 남아있다.

그 당시 한국 교포학생회 회장직을 오기창(후에 워싱톤 디·씨에 있는 아메리칸 카톨릭대학교의 부통장까지 역임한 정치학자)님이 맡고 있었다. 나와는 중학교 선후배 관례로 일제시대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하루는 만난 자리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강연회를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 회장 보고 글세 강연회를 갖는 것은 좋지만 아마도 박정희의 P자도 폴리틱스의 P자도 강연에서 언급은 없을 것이라고 나의 소견을 말했더니 오 회장은 다소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화이트하우스의 옆에 있는 YMCA 강당은 입추의 여지가 없이 한국인 교포로 가득 차 있었다. 선생님의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읽은 교포들은 어쩌면 당시의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에서 군사독재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사자후를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나의 오 회장에게 한 말은 그대로 적중되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은 입추의 여지가 없이 가득 찬 청중들에게 저 태평양 건너 저 땅 내 나라에 살면 핑계라도 있지 이 좋은 나라에 와 있는 여러분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요지의 강연을 오후 2시부터 시작해서 두 시간이 훨씬 넘도록 선생님의 그 독특한 동서양의 고사를 망라한 말씀 속에 정말로 박정희의 P자도 폴리틱스의 P자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강연회가 끝난 후 워싱톤 교포사회에서는 함석헌은 군사독재정권의 사꾸라가 아니냐? 라는 소리가 차츰 퍼지기 시작하였다.
선생님께서 1962년 5월 8일자로 안병무 박사에게 쓰신 편지에는 유럽여행 계획이 10개 항목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0번에 "다음 편지는 이 주소로 주시오. '1824 Lamont ST. Washington 10. D. C.'"라고 쓰여져 있다. 나도 잊고 있었던 나의 미국 생활에서 잊지 못하는 워싱톤 디·씨의 나의 아파트 주소다. (전집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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