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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실’ 실종된 텍스트 … 외국저술 명목적 수용
‘한국 현실’ 실종된 텍스트 … 외국저술 명목적 수용
  • 강수택
  • 승인 2003.05.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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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 번역교과서, 이대로 좋은가

어떤 책을 강의 교재로 삼을 것인가 하는 것은, 심지어 많은 교과서가 나와 있는 사회학 개론 같은 과목에서조차 매우 어려운 문제다. 이것은 자연과학과 달리 사회과학, 특히 사회학 교과목의 특성상 강의할 주제와 강조점, 논의방향 등을 강의 담당자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공과목의 경우에는 선택 폭이 훨씬 좁아진다.

가능하면 국내 필자가 쓴 책을 주된 교과서로 삼고자 하지만 적절한 책을 선택하기 어려워 번역된 책을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사회과학에서조차 사용되는 교과서의 압도적인 다수가 번역서라고 한다. 국내 저자가 쓴 책과 비교할 때 해외 저자가 쓴 번역 교과서들은 우선 전체 종류가 많을 뿐 아니라 최근의 관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흥미로운 주제를 함께 다루는 책이나 저자 자신의 일관된 관점을 살려 집필한 수준 높은 책도 많다. 하지만 번역교과서의 한계 내지는 문제도 많다.

오역과 과대포장에 젖은 수입 지식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한계는, 대체로 국내 저서에 비해 읽기 어렵고 오역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번역수준이 놀랄 만큼 향상돼 이런 문제가 많이 해소된 듯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필자는 사회학이론과 지식사회학을 강의해 왔는데 약 10년 전만 하더라도 교재 가운데 중요한 개념이 오역된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버거와 루크만이 함께 쓴 어떤 책은 오역을 바로잡아주는 데 수업시간의 많은 부분을 할애해야 할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학술도서 시장이 좁아서 어떤 책이 한번 잘못 번역되면 더 나은 번역본이 출판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번역 교과서의 보다 중요한 한계는 한국사회 현실을 콘텍스트로 삼지 않은 데에서 기인한다. 즉, 교과서의 배경이 되는 외국사회 현실과 한국사회 현실을 혼동할 가능성이 크고, 나아가 외국현실을 표준으로 간주해 한국사회 현실을 평가할 위험조차 안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할 점은, 번역 교과서도 저자가 속한 학문공동체의 지적인 경향을 반영한다는 사실과 관련 있다. 명망 있는 해외 학자가 집필한 번역 교과서는 그 분야의 표준서로 맹목적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설혹 저자가 자신의 책을 과감히 수정 혹은 보완하더라도 번역서는 이를 반영시키기 쉽지 않다.

사회학 이론과목에서는 조나단 터너의 어떤 책이 오랫동안 교과서로 사용됐다. 당시 미국에서 교과서로 널리 사용되던 이 책은 1980년대에 처음으로 번역됐는데 주로 미국 사회학 이론을 현대 사회학 이론으로 소개했다. 1991년 필자가 외국의 한 서점에서 발견한 이 책은 국내에서 번역된 책과 전혀 다른 책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많이 바뀌어 있었다. 말하자면 미국 이론에 대한 편향성이 상당히 시정됐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2001년에 와서야 증보판에 대한 번역서가 출간됐다.

국내 학자들이 책임감을 갖고 집필한 교과서들이 특히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절실히 요구된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교과서라고 하면 일반 연구서와 구별해 낮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일반 대중을 독자로 삼는 교양서적보다도 교과서를 낮게 취급하는 이런 경향 때문에 교과서 집필을 개인적으로 꺼리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업적 심사기준에서 교과서를 일반 연구서보다 낮게 평가하는 경우와 교과서를 평가대상에서 제외하는 경우조차 있다. 교과서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인식은 간혹 자신의 대형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만을 염두에 두고 외국 교과서를 베끼다시피 하거나 출처도 없이 모자이크해서 교과서를 낸 과거의 나쁜 사례들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개인·소규모 교과서 저술 지원 시급

학회 차원에서 교과서를 공동 집필하는 경향은 기본적으로 이런 현실적인 상황과 관련돼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공동 집필된 교과서는 세부전공자들의 전문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내용의 일관성과 책임감이 겸비된 교과서를 위해서는 할 수만 있다면 다수의 필자가 공동집필하는 것보다 개인이 단독으로 집필하거나 소수의 필자가 함께 집필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서는 학문적으로 성숙한 학자들이 수준 높은 교재류의 서적을 적극적으로 집필하고 출판할 수 있도록 하는 여건이 조성될 필요가 있다. 다행히 교과서 집필 지원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몇몇 재단도 있으나 아직 수혜 범위가 너무 좁다. 따라서 한국 학술진흥재단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수준 높은 교과서의 집필노력을 정당하게 인정해줄 수 있는 평가기준을 개발하여 업적평가에 활용하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강수택 / 경상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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