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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에 관한 독선적 해석 경계한다”
“동양철학에 관한 독선적 해석 경계한다”
  • 박경일 경희대
  • 승인 2003.05.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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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 김진석 교수의 반론에 답한다

김진석 교수의 반론에 박경일 교수가 반박의 글을 보내왔다. 박 교수는 자신의 비판에 대한 김 교수의 대응이 학술적인 태도가 아니었다고 실망을 드러내면서, 그의 동양담론 비판이 불교배제, 독선적 해석, 비상식적 글쓰기로 일관돼 있다는 기본입장을 다시 강조했다.

필자는 ‘오늘의 동양사상’에 게재한 글 ‘동양철학은 공허한가’에서, ‘동양(철학)의 실체’를 근원적으로 부정하고 해체론적 동양철학 읽기 또는 동양철학적 해체론 읽기를 “요란한 소리만 내는 깡통” 수준의 웃기는 ‘개그’로 비하하는 김진석 교수의 글 ‘동양 담론의 공허함’을 비판한 바 있다.

동양철학자도 해체론 전문가도 아닌 필자는 단지 동서비교문학자로서 ‘우리 학문’, ‘우리 담론’을 창출하기 위해 우리 학문이 편협한 전공주의를 넘어 모든 역량들을 결집하자는 취지에서 광범한 동서학문공동체적 학제간 협동연구 환경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또 한편으로 김 교수의 텍스트에 대한 세밀한 분석/비판을 통해 치열하지만 이성적인 학술논쟁의 방법론을 나름대로 제시해보고자 했었다. 그러나 진지한 학술적 비판에 대한 응답(교수신문 제268호)이 ‘난도질’, ‘저열한 왜곡/선동’, ‘한심한 식민주의’, ‘허약한 연구자의 사대주의’ 등이어서 실망을 금할 수 없다.

학문은 해석의 공동체

김 교수는 필자가 ‘특강 요약문’만 가지고 ‘난도질’했다고 비난했으나, 필자는 당시 모 대학에서 철학과가 간판을 내리는 암울한 상황과 시기를 같이 했던 모처럼의 국민적 동양학 열기에 근거 없는 찬물을 끼얹는 문제의 ‘특강 풀텍스트’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김 교수의 다른 연구물들을 논의하지 않았을 뿐이다(물론 필자는 그 당시 ‘오늘의 동양사상’에 게재된 김 교수의 글, 그밖에 ‘교수신문’에 게재된 그의 글들과 그의 저서들에 관한 글들을 몇 편 읽고 참고했다).

반대로 김 교수의 경우 ‘동양 담론의 공허함’을 논증하기 위해서는 동양 담론을 구성하는 ‘모든’ 담론들을 ‘낱낱이’ 논의했어야 하며, 따라서 예컨대, 동양 담론의 한 핵심을 점하는 불교에 관한 논의가 누락된 것은 학문방법론상의 ‘기본적’이고 치명적인 오류다. 나는 불교를 다루지 않았다고 해서 동양 담론 비판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는 김 교수의 논리는 ‘인도의 장님들과 코끼리’의 비유를 연상케 하며, 또 한편으로는 사상누각처럼 자기해체적이다.

현대적 동양담론 해석에 대한 김 교수의 비판에서 필자가 특히 문제삼은 것은 해체론과 동양철학에 관한 그의 개인주의적/독선적 해석(“철학의 위험은 너무 멀리 모험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가는 것”이다)과 상식적인 관행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여겨지는 그의 글쓰기였다.

김 교수는 필자의 논의에 대해 “이차문헌에 소개되는 수준” 운운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비하하는 꼴이다. 모든 텍스트들은 어떤 의미에서 2차문헌이다. 모두 폐기처분돼야 할 쓰레기들인가. 학문은 발전적으로 구현된 해석의 공동체 아니겠는가. 학문은 ‘휴일날 공원의 자유연설’이 아니다.

동양철학의 상호의존적/해체적/상생적 사상은 오늘의 전지구적 생태·환경 위기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졸고 ‘생태철학: 동과 서’ 참조). 우리의 전통 사상이 자본주의와 기술문명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읽어내는 데 별 의미와 설득력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퇴계가 읽히지 않으며, 따라서 칸트가 우리에게는 퇴계만큼이나 가깝고 퇴계는 칸트만큼 멀다는 식의 논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호머와 플라톤이 오늘날까지 읽히는 이유가 그런 것인가.

“불교 논의 배제한 것은 학문적 오류”

‘기본적’인 것이 곧 ‘가치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 학문/교육의 가장 염려스러운 대목이 바로 이 ‘기본’의 부실이다. 예컨대, 서울 소재의 저명대학 도서관들과 대형서점들에서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의 영문본 하나, 제대로 된 우리말 번역본 하나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며, 데리다의 핵심적 에세이 ‘디페랑스’ 하나도 제대로 된 우리말 번역본을 찾기가 어렵다. 해체철학의 핵심적 자료들 없이 어떻게 해체철학과 이를 이론적 배경으로 하는 광범한 포스트모던 이론들을 제대로 연구할 수 있겠는가.

불교의 緣起/空 사상은 서구적 해체철학을 예고했던 텍스트로 읽힐 수 있으며, 니체와 데리다 철학은 이에 대한 현대적 주석으로 읽혀질 수 있다. 니체와 하이데거와 데리다와 바르트와 비트겐슈타인을 불교와 나가르주나와 노-장자와 함께 서로 버텨 읽고 있는 국내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시도들은 우리의 동서철학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자생력 있는 강력한 학문적 국제경쟁력은 ‘우리 것’을 바탕으로 할 때 얻어지는 것 아닐까 싶다.

박경일 경희대·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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