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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노이아’, 기획의 종결을 가능케 하는 관점의 변화
‘메타노이아’, 기획의 종결을 가능케 하는 관점의 변화
  • 교수신문
  • 승인 2017.11.20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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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읽는 신간_ 『코뮤니스트 후기』 보리스 그로이스 지음, 김수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194쪽, 13,000원

어째서 사회주의 국가의 공산당들은 공산주의 기획 작업을 중단하고―처음에는 소비에트가 그랬고 나중에는 중국 공산당이 그랬듯―그 대신 자신들의 국가 안에 자본주의를 건설하는 일에 착수했던 것일까? 이 질문은 유물론적 변증법의 맥락에서 검토될 때에만 비로소 바른 답변을 얻을 수 있다. 앞서 기술했듯이, 변증법은 A와 ~A의 통일에 관해 사유한다. A가 어떤 기획이라면,  ~A는 이 기획의 맥락이다. 특정 기획을 일관되게 밀고 나간다는 것은 곧 일면적으로 행동한다는 뜻이 된다. 이 기획의 맥락, 즉 그것의 안티테제가 무시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기획의 맥락이란 사실 그 기획의 운명이기도 한바, 이 맥락은 그 기획이 실현되는 조건들을 지시한다. 총체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의 기획에서 그것의 맥락으로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맥락이 자본주의였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다음 실현 단계는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절대로 해당 기획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의 체계적이고 최종적인 구현에 해당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산주의는 진실로 공간뿐 아니라 시간에서도 자신의 역사적 장소를 얻게 되는바, 즉 완결된 역사적 형성물로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형성물은 원만한 여건이 조성될 경우 얼마든지 재생산돼 반복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스스로를 열린 사회라고 이해하는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어떻게 그것의 기획들을 제한하고 마무리지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완결되고 완성된 기획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열린 사회에서 경제 성장, 과학 연구, 그리고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은 차이나 욕망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오직 무한한 것으로서만 사고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기획들을 실현하는 데 모종의 한계가 전제된다면, 그 한계는 오로지 해당 기획이 삶 속에서 실현되기 위한 ‘객관적’ 조건들에 따른 것이다. 이렇듯 열린 사회에서의 기획들은 외부로부터 그것들이 중단되는 한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앞서 논의했듯이, 자금 부족은 이 기획들이 어떤 지점에선가 중단되도록, 그래서 마침내 형태를 얻어 실현될 수 있도록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다. 기획들을 중단시키는 또 다른 원인으로 세대 교체가 있다. 하나의 기획을 주창했던 세대가 죽으면 새로운 세대는 그 기획에 관심을 잃게 되고 자연히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된다. 기획들은 실현되지 못하고 다만 ‘늙어가게’ 된다. 근대의 열린 사회는 거의 온전히 생물학적 요인들에 따른 리듬을 갖는다. 각 세대는 보통 10년 주기로 일선에서 물러나는데, 이 기간 동안 자신의 기획들을 형성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물론 이 작업이 후대에 이어져 계속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사유되고 실행된 모든 것들이 시대에 뒤처진 것이 되거나 본래 의미와는 상관없는 것이 되기 마련이다. 이렇듯 열린 사회에서 경제와 생물학은 기획들을 제한하고 마무리짓고 육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둘이 없다면 그 기획들은 결코 형태, 즉 몸을 얻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헤겔이 악무한(bad infinity)이라고 부른 가상의 기획적 무한성에 대한 제한은 열린 사회에서도 당연히 작동한다. 문제의 핵심은 정말로 종결이 일어나는지의 여부가 아니라―그런 일은 어디서든 일어난다―그것이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가다. 열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획의 종결은 전적으로 자본에 달려 있다. 반면, 철학은 언제나 이러한 종결, 제한, 방해 그리고 이행을 독자적으로 전유해 내부로부터 조정할 것을 지향해왔다. 실제로 하나의 기획이 종결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대상 자체에 대한 탐구에서 그것의 맥락을 구성하는 것으로 옮겨가면서 관점을 변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 전통에서 그러한 관점의 변화는 ‘메타노이아(metanoia)’라고 불린다. 메타노이아라는 용어는 개인의 사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으로부터 보편적인 관점으로, 즉 메타적인 위치로 이행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또 기독교 전통에서 메타노이아는 신앙을 얻게 되는 것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용법 역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의 변화를 뜻한다.

□ 저자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는 1965년 구소련의 레닌그라드대에서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1976년부터 모스크바대 구조응용언어학 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훗날 ‘모스크바 개념주의’라는 명칭으로 알려지게 될 비공식 예술가 그룹과 교류했다. 1981년 서독으로 이주, 1992년에 뮌헨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뉴욕대 러시아 및 슬라브 연구 글로벌 석좌교수로 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미학적 기획과 스탈린의 정치적 기획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통찰한 첫 저서 『스탈린의 종합예술(Gesamtkunstwerk Stalin_』(1988, 한국어판: 『아방가르드와 현대성』)을 통해 동시대 가장 논쟁적인 사상가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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