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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00권을 향한 열정은 뜨거우나 개념·기준은 불분명
고전 100권을 향한 열정은 뜨거우나 개념·기준은 불분명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7.09.12 10:4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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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형준 홍익대 교수, 세계문학컬렉션 축역정본 20권 출간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청소년들에게 중요한 고전이니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그게 고전에 대한 죄의식과 부채감을 갖게 만들며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만드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전공자인 내게도 어려운 고전을 읽으라는 위선은 그만두자는 다짐으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축역본을 쓰는데 10년을 바쳤다.”

진형준 홍익대 교수(불어불문학과)는 지난 7일 프레스센터에서 ‘제4차 산업혁명세대를 위한 생각하는 힘 시리즈: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이하 세계문학컬렉션) 기자간담회에서 지난 10년의 세월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세계문학컬렉션 축역본은 몇 번이나 읽기를 시도했다가 고전을 덮어버린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젝트다. 진 교수와 40년 지기인 심만수 살림출판사 대표가 2002년 이 프로젝트를 진행시키려했지만 ‘문학은 완역본’이라는 국민들의 심리적 벽이 높아 실현할 수 없었다. 5년이 흐른 2007년, 마침내 진형준 교수가 번역 작업에 착수하면서 10년이 지난 2017년 가을에 드디어 20권의 초판이 세상에 나왔다.

10년 간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작업에 매진한 진 교수는 번역을 하면서 3가지 원칙을 고수했다. 각 시대의 영혼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선정하고 작품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게 하는 해석을 덧붙일 것, 문학성과 원전의 정신을 살리되 우리말로 된 새 작품을 쓴다는 생각으로 쓸 것, 마지막으로 고전완역본을 읽을 때 느낀 재미와 감동을 독자도 비슷하게 느낄 수 있도록 쓸 것이 그것이었다.

이번 세계문학컬렉션 축역본은 살림출판사의 ‘생각하는 힘 시리즈’의 일환이다. 심만수 대표는“정답을 외우는 교육은 노동자, 군인을 양성하기 위해 출발한 것이다”며 “4차 산업혁명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갈 수 있는 만드는 용기와 감동은 생각하는 힘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살림출판사는 번역작업이 마치는 대로 계속해서 100권까지 출간할 계획이다.

일단 긍정적인 부분은 여기까지. 세계문학컬렉션 축역본 프로젝트는 분명 의미 있는 작업이다. 이 기획은 야심차고 명분도 제법 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그 자체로 치명적인 오류와 한계를 노출했다.

첫째로 100편의 고전 리스트 선정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진 교수는 세계 유수 대학이나 출판사들의 리스트를 참조했다고는 하지만 왜 이 작품들이 100편에 선정됐는지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둘째로 진 교수는 이번 세계문학컬렉션이 ‘축역정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어떤 책을 저본으로 삼았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한 답을 하지 않았다. ‘축역정본’이란 말도 편의적일 뿐이다. “불어, 영어 원문을 읽었다”고 답했지만 출간된 20권 중의 하나인『열국지』는 한자가 원문이다. 진 교수와 출판사측은‘축역정본’의 개념과 저본의 확증에 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로는 발췌번역이나 요약은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진 교수가 임의로 덧붙인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번역자의 역할에서 멈추지 않고 텍스트 그 자체에 개입한 것인데, 이에 대해 진 교수는 ‘축역은 의역의 한 형태’라며 “원작가들의위대한 정신에 누가 되지 않는 차원에서 나의 창작이 조금 있다”고 설명했다. 앞뒤가 모순되는 대목이다.

넷째로 100편의 고전을 모두 단 한 명, 진 교수가 번역한다는 것이다. 물론 진 교수는 제2대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역임할 정도로 실력 있는 학자임에 틀림없다. 전공언어를 넘어선 부분에서 번역을 시도할 수는 있지만 그 번역본이 축역본 정본의 자리를 점유하기는 무리가 따른다. 학자 개인의 역량을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다섯째로는 2000페이지에 달하는 『돈키호테』나 『레미제라블』 같은 책들이 어떤 책은 150쪽으로, 또 어떤 책은 100쪽이나 300쪽으로 줄어드는데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도, 이번 기획이 ‘반쪽짜리’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무엇보다 세계문학컬렉션 축역본이 가진 결정적인 한계는 고전이 주는 지적훈련을 배제한 것이다. 고전을 읽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고전이 주는 가장 중요한 미덕 중 하나는 두꺼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기까지의 과정 즉, 책과 씨름하는 훈련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과정을 통해 한 단계 더 지적, 감성적 도약이 이뤄진다는 게 고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러니까 축역본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인 셈이다.

어쩌면 이 축역본은, 전공자 외에는 아무도 읽지 않는 고전의 중요성을 디지털 시대의 청소년들에게 읽히기 위한 출판계의 눈물겨운 자구 노력에서 나온 고육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선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축역정본’을 향한 열정과 계획에는 안에서부터 파열음을 내는 불협화음이 도사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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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 2017-09-22 11:36:17
10년만에 20권이 나왔다는데 다섯권이라도 읽고 서평을 쓰지 이렇게 대충 보고 인상비평을 하는 것이 누구에게 쓸모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