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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리티 담론으로 ‘문명화’ 시작된 소사회 역사공간을 읽다
로컬리티 담론으로 ‘문명화’ 시작된 소사회 역사공간을 읽다
  • 오미일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교수
  • 승인 2017.05.23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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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제국의 관문, 개항장도시의 식민지 근대』 오미일 지음, 도서출판 선인, 451쪽, 40,000원

 

개항장이 있었던 소사회의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제국주의·식민주의의 폭력과 경제적 침탈에 대한 한국인들의 저항의식의 터에 생활공동체=정치공동체가 존재했고, 이는 실재적 생존투쟁의 거점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민족의식의 형성은 서구로부터 유입된 사상이나 인쇄매체에 의해 영향 받기 이전에, 이미 생활공동체의 자위적인 투쟁에서 비롯됐으며, 그리고 청일전쟁·러일전쟁과 같은 제국주의전쟁을 겪으면서 시간적 경과물로 형성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로컬리티 담론에 기초한 小社會 연구를 통해 메타 히스토리, 내셔널 히스토리 중심의 역사서술을 전환하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역사란 구성되는 공간마다 다른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대문자로 쓰이는 ‘역사(History)’는 언제나 이 상이한 시간들을 하나의 시간 안에 포획하거나 포섭한다. 그동안 세계의 거의 모든 역사 연구를 고취하고 체계화하는 동력을 부여한 패러다임은 ‘진보’라는 사고체계였다. 그리고 그 진보의 척도는 ‘문명’이었다.  

하지만 여태껏 자명하다고 받아들여져 왔던 가설 즉 문명이란 척도에 의해 개념화된 ‘진보’ 그 자체에 대해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 아리프 딜릭이 ‘지역적인 것은 유산이 아닌 기획’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일상적 생활의 필요에 따라 형성된 인간관계를 강조하며 발전지상주의 이데올로기를 발본적으로 거부하고, 토착주의(indigenism)를 주장하는 것이 하나의 예다. 로컬리티 담론과 그 문제의식에 기초한 소사회 역사연구는 문명을 기준으로 하는 진보의 사고체계를 의심하고 전복하는 패러다임의 하나다.

푸코가 꿈꾸는, ‘판단을 시도하지 않는 비판’은 로컬리티 담론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푸코는 사회 분석에서 근본적인 회의주의를 주창한다. 예를 들어 현재가 과거보다 우월하다거나 역사적으로 진보해왔다고 하는 가정 또는 유럽 대륙 외부에 있는 국가들을 ‘개발도상국가’나 ‘산업화 이전의 나라들’로 묘사하며 그들의 삶을 ‘원시적’이라거나 ‘단순하다’고 하는 ‘판단’들은 서구 자본주의 모델을 은연중에 전제한 것이라고 본다. 지식과 권력에 관한 푸코의 이론은 우리가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이는 지식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생산됐고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지에 관해 생각하게 만든다.

複數의 역사를 상상하고 서사화 하기

전지구화와 공간동질화에 대한 대항을 사유하는 로컬리티 역사연구는 역사공간 안에서 거의 유일한 서술축이자 행위 주체로 국가/국민을 사고하던 것에서 벗어나, 그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상충되는 힘(주체)들이 경합하고 대결하는 역사적 공간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단일한 보편적 역사에 포섭되면서 동질화된 소사회의 역사 층위를 더듬어, 묻히고 접혀진 결들을 펴내는 작업을 통해 복수의 역사를 상상하고 서사화하는 것이다. 국가의 거대 기억, 공식기억에서 배제된 소사회의 기억을 통해 국가경계 단위로 서술된 국민의 역사가 아닌 다원화된 소사회 질서 속의 인간의 역사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소사회는 독일 철학자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의 체험공간(erlebter Raum) 혹은 뒤르크하임의 살아가는 공간(gelebter Raum)에 상응하는 역사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로컬리티 역사 연구의 대표적인 예로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의 일본사 연구자인 테사 모리스 스즈키가 변경(아이누의 오호츠크해역)을 서사의 중심으로 놓고 역사를 읽어낸 연구방법을 들 수 있다. 종래 변경은 국민국가들의 접촉면, 즉 경합하는 국가/국민적 서사들이 만나는 지점으로만 간주되었으나, 그는 이러한 관점의 역전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면 소사회 역사공간에 대한 연구는 현재의 글로벌 자본주의체제에 어떤 성찰을 제기하고 반란을 제기할 수 있을까? 『공유의 비극을 넘어』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엘리너 오스트롬은 15세기 스페인 발렌시아 우에르타지역, 17세기 필리핀의 일로코스 노르테 지역 등 몇 개의 공유자원체계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통해 국가 혹은 외부의 리바이어던(leviathan) 없이도 충분히 지속가능한 자치적 공유자원체계가 가능했고 오랫동안 유지돼 왔음을 입증했다. 이와 같이 소사회의 역사적 공간에 대한 연구는 글로벌시대 오늘날의 우리가 봉착한 문제에 대한 대안을 사고하는 지평을 열어준다.

로컬리티 역사연구의 대상으로 개항장도시를 택한 이유는 현대 한국 사회체제의 기원이라고 할 ‘문명화’가 시작된 역사공간이기 때문이다. 개항장은 서양 문물과 사조가 유입되는 세계자본주의체제의 투입구였다. 이곳으로부터 확산된 자본주의 경제와 서구 사조는 점차 전통사회의 정치경제제도를 균열시키고 사회체제를 해체시키는 단서로 작용했다. 또한 식민주의가 가장 먼저 체제화 됐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저항이 격렬했던 곳도 개항장도시였다. 개항장도시의 역사를 공간/주체/기억의 세 국면으로 접근해, 1부 식민지 근대의 공간적 구현, 2부 근대 주체의 형성과 지역정치, 3부 동원의 일상: 의례와 기억으로 구성했다.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저항의식의 발현 차원에서 접근

이 책의 주요 논점의 하나는 개항장도시의 식민지 근대를 소사회에서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저항의식의 발현이란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점이다. 종래 한국사에서 근대적 민족의식은 한말 사회진화론과 민족주의사상이 수입돼 서적·신문매체나 강연을 통해 전파되며 자강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국가 단위로 자료를 독해하지 않는다면 역사는 다르게 구성될 수도 있다. 

“노동계급은 정해진 시간에 태양이 떠오르듯이 정해진 어느 시간에 떠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계급 자신이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라고 말한 에드워드 톰슨의 언급에 비유한다면, 민족의식은 이미 훨씬 이전부터 민중들의 생활 속에서 체득되면서 형성돼 왔다고 할 수 있다. 즉 톰슨이 계급을 경제구조나 생산수단관계 속에서 위치 지워지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인간관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어떤 것 즉 역사적 형성물로서 파악했듯이, 한국 근대 주체의 민족의식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1898년 5월 원산에 체류하고 있던 러시아 군인들이 술을 마시다가 조선인 2명을 살해한 사건에서 발단되어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원산 민중들은 러시아 군인, 프랑스인 선교사뿐만 아니라, 일본인 경찰관과 상인, 그 외에 캐나다와 미국 선교사 등의 외국인들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가운데 때로는 미개한 종족으로 취급받으며 인간적인 모멸을 당하거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위협받고 있었지만, 정부 권력은 보호막이 되지 못했다. 이들은 홉스 봄이 말하는 ‘무이데올로기’의 前정치적 민중이 아니었으니, 외국인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과 경제적 위협 등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적극적인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개항장이 있었던 소사회의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제국주의·식민주의의 폭력과 경제적 침탈에 대한 한국인들의 저항의식의 터에 생활공동체=정치공동체가 존재했고, 이는 실재적 생존투쟁의 거점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민족의식의 형성은 서구로부터 유입된 사상이나 인쇄매체에 의해 영향 받기 이전에, 이미 생활공동체의 자위적인 투쟁에서 비롯됐으며, 그리고 청일전쟁·러일전쟁과 같은 제국주의전쟁을 겪으면서 시간적 경과물로 형성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미일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교수
제국주의 혹은 세계자본주의체제에 의해 고안되고 만들어지는 사회경제적 프로그램과 제도, 공간정책들이 소사회의 일상적 삶을 통제하고 포섭하는 과정에 대해 연구해왔다. 기회가 되면 한국역사에서 ‘발전과 성장’ 패러다임에 대항하며 대안을 제시해온 경제적 사유와 실천행동들에 대해 연구해볼 계획이다. 저서로는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 『경제운동』, 『한국근대자본가연구』, 『식민지시대 사회성격과 농업문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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