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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란 본래 자기 본성 … 지속-혁신의 팽팽한 긴장이 역사 창조의 원동력"
"부처란 본래 자기 본성 … 지속-혁신의 팽팽한 긴장이 역사 창조의 원동력"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4.10 11: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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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_ 1강. 인경 동방대학원대 교수의 ‘혜능, 동아시아 불교의 탄생’

“『육조단경』의 혜능은 인도불교에서 확립된 불성 사상을 단순하게 철학적 개념으로서 이해하지 않고, 그것을 ‘나의’ 몸 안에 있는 자성, 본성, 영성, 본래면목으로 파악함으로써 선문답에 의한 견성, 돈오가 부처를 이룬다는 매우 혁신적인 사상을 펼쳤다.”
지난 1일(토)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북파크 카오스홀에서 열린 2017 문화의 안과 밖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첫 강연은 ‘동아시아 불교의 탄생’에 주목했다. 강연자는 동방대학원대 자연치유학과 교수인 인경 스님. 선불교의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 혜능의 사상을 심도 있게 이야기함으로써, 모두 34강에 걸쳐 새로운 시대로 도약을 가능케 한 역사적 인물 혹은 작품을 선정해 혁신적 사유를 조명하는 문화의 안과 밖 시즌4의 지적 방향성을 흥미롭게 드러냈다.
인경 스님은 “거시적 패러다임으로 불교사를 볼 때, 패러다임의 ‘지속’은 인도의 대승불교이고, 동아시아의 선불교는 인도적 대승불교의 패러다임에 대한 ‘갱신’에 상응한다”라고 진단하면서 『육조단경』의 혜능으로부터 시작된 선문답의 원류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아시아 불교의 가장 중요한 특색을 말할 때, 그것은 다름 아닌 곧 선불교를 빼놓고는 말할 수가 없다. 동아시아 역사상에 나타난 다양한 불교 사상들은 대부분 인도에서 유입된 사상에 바탕을 두고 성립됐다. 선불교는 인도에서 기원한 대승불교의 불성사상에 근거한 바이지만, 동아시아 전통에서 새롭게 일어난 가장 동아시아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상이 아닌가 한다. 거시적 패러다임으로 불교사를 볼 때, 패러다임의 ‘지속’은 인도의 대승불교이고, 동아시아의 선불교는 인도적 대승불교의 패러다임에 대한 ‘갱신’에 상응한다고 판단된다.

선불교(禪宗)에서 보여주는 ‘깨달음’이란, 개인이 가진 기존 인식논리와 관념을 송두리째 파괴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과정이 아닌가 한다. 선종의 선문답은 이론적인 탐색이나, 선행하는 사상을 해석하는 교학체계를 중시하지 않는다. 대신에 직접적인 대화를 강조하고 ‘직관’을 강조한다. 대화를 통해서 통찰을 얻고 기존의 해석체계가 ‘부서지는’ 경험을 하면서, ‘깨달음’에 도달한다. 조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교조적으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 보면 교조적 교설을 파괴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근원에 도달하게 한다. 이런 혁신적인 방식이 바로 선문답의 특성이다.

선문답의 원류는 『六祖壇經』의 혜능으로부터 시작된다. 본 주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 먼저 혜능과 『육조단경』에 대한 몇 가지를 합의할 필요가 있다. 어떤 학자들은 혜능이란 인물이 과연 존재나 했는지 의문을 표시하기도 한다. 일단 필자는 여기서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서 혜능이란 인물은 역사적으로 실제로 존재한 인물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육조단경』에서 전하는 혜능의 선사상이 전적으로 혜능에 속한 것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본다. 오늘날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경우처럼, 『육조단경』에 나타난 혜능의 선사상과 『육조단경』을 편집한 이들의 사상을 엄밀하게 구별해낼 수가 없다. 어느 정도가 혜능의 사상이고, 어느 만큼이 신회계통의 것인지 현재의 시점에서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본고에서는 『육조단경』을 통해서 나타난 혜능의 모습이란 의미에서 ‘『육조단경』의 혜능’이란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見性成佛, 성품을 보아서 부처를 이룬다

『육조단경』의 핵심사상은 ‘見性成佛’이다. 이후 ‘성품을 보아서 부처를 이룬다’는 ‘견성성불’이란 용어는 동아시아 불교의 대표적인 키워드가 됐다. ‘부처를 이루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면, ‘성품을 보는 것’은 그곳에 이르는 방법적인 측면을 말한다. 불성사상은 대승불교 이후로 ‘무엇이 부처인가?’ 라는 질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혜능단경』의 惠能(638~713)은 전통적으로 종교에서 강조해온 귀의와 구원을 어떻게 이해할까. 일반적인 종교적 관념에서는 귀의나 구원은 절대자를 전제하고, 신앙으로서 ‘귀의’는 외적 절대자에 대한 귀의이고, 구원 또한 절대자에 의해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신앙적 관념을 말한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비교하여 보면, 『혜능단경』의 혜능은 전혀 다른 혁신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육조단경』의 혜능은 외적인 절대자로서의 부처님을 배제하고, 자기 몸 안에 있는 부처에게 귀의를 강조한다. 여기서 몸 안에 있는 부처란 바로 자기의 본성을 말한다. 이것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혁신하는 새로운 형태로, 경전을 과도하게 강조하지 않고, 형상화된 불상을 과도하게 숭배하지 않는다. 또한 경전이나 논서에서 다루는 철학적인 지식에 과도하게 목말라할 필요가 없다. 자기 자신이 그대로 부처가 되는 까닭에, 부처는 구원자가 아니다. 만약에 유일한 구원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일 뿐이다. 사상적 패러다임의 전개과정을 정리하면 ‘초기불교의 법중심 → 대승불교의 불성 → 『육조단경』의 견성’에로 변천해 왔음을 알 수가 있다.

선문답, 돈오(頓悟)의 길목

『육조단경』에 따르면 성불은 ‘자성을 보는 것(見性)’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견성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자성을 본다’는 것의 직접적인 접근통로는 무엇인가? 필자가 보기에는 그것은 바로 ‘선문답’이라고 본다. 또한 동아시아 불교의 가장 혁신적이고 독특한 측면은 바로 선문답을 통해서 탄생됐다고 본다.

여기의 핵심된 포인트는 앞에서 논의한 바의 자성, 불성, 영성이다. 혜능이 말한 바처럼, 몸이나 마음현상은 태어난 지역에 따라서 관습이 있고, 문화가 있고, 남북이 서로 다를 수가 있다. 그러나 佛性은 혜능에게 있어서나 弘忍에게 있어서나, 그리고 慧明에게 있어서나 서로에게 차별이 없이, 다르지 않다. 그러니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선문답에 나타난 이러한 ‘결정적 질문’은 바로 본성을 직관하는 ‘견성’의 촉발로서 작동한다. 선문답의 과정은 『육조단경』 이후에 도에 들어가는 중요한 수단이나 방법으로 활용됐다는 점에서 고유한 방식이라고 본다.

수증론, 닦음의 정혜와 깨달음의 자성

전통적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중생은 번뇌에 휩싸이고, 어리석고 미혹한 까닭에, 止觀으로써 마음을 닦아야 한다. 지관이 닦음의 출발이고 定慧는 지관에 의해서 도달하는 특정한 수준으로서 수행결과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육조단경』의 혜능은 전통적인 수행체계인 ‘정혜’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이해할까. 인간에게는 ‘본래 스스로 깨닫는 성품’의 존재를 강조하고, ‘곧장 성품을 보아서 부처를 이룬다’는 관점에서 볼 때, 지관이나 정혜는 어떻게 이해될까. 『육조단경』의 구성은 전기편, 법문편, 제자와의 문답편으로 구성돼 있는데, 전기편은 혜능대사의 전기를 기록한 부분으로 ‘어떻게 오조홍인의 법을 계승하였는지’를 기술한다. 전기에 의하면, 가장 큰 쟁점은 닦음(修)과 깨달음(證)의 문제다.

『육조단경』에 의하면 신수의 점수와 혜능의 돈오는 서로 대립된,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다. 번뇌의 존재를 인정하는 신수의 북종은 점진적인 방식으로 계정혜를 통해서 닦아야 한다. 그러나 혜능의 남종은 자성, 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서 보면 계정혜가 자성에 그 자체로 갖춰진 까닭에 별도의 닦음을 가차하지 않는다. 이런 깨달음의 강조는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이라 양진영에 긴장감과 함께 우열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들 사이는 기존의 패러다임과 혁신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나면서 생겨난 ‘본질적 긴장’과 같은 종류 같은 팽팽한 갈등이 있다.

『육조단경』의 혜능은, 앞에서 보듯이 신수의 계정혜 삼학에 대한 가르침과는 다르게, 계정혜 삼학을 아예 세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자기 성품을 보는 ‘견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정혜에 기반한 수행전통에서 보면, 혁신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사실 자성, 영성, 불성에 수행의 기준점을 둔다면, 사실상 ‘닦음’이 필요가 없다. 왜냐면 자성은 그 자체로 부족함이 없는 모든 공덕과 지혜와 선정을 스스로 이미 갖춘 까닭이다. 이것들을 구하기 위해서 다시 ‘닦음’이란 인위적인 노력을 두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이런 입장에 서면 자성에 대해서 단지 돈오일 뿐이고, 번뇌에 대해서 頓修만 인정된다. 그렇긴 하지만, 혜능은 전통적인 정혜의 수행에 대해서 부정만은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이점에 대해서 『육조단경』에는 직접적인 설명이 없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기존의 뉴튼의 절대적 공간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적 공간에 의해서 흡수되어 포섭된 것과 유사하게, 기존의 계정혜란 개념을 자성, 심지, 본성, 영성, 불성에로 통합되어 버린 것이다.

보조지눌의 돈오점수와 관련하여

이 강좌의 대주제인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선불교를 바라볼 때, 패러다임의 ‘지속’은 인도의 대승불교이고, 동아시아의 선불교는 인도적 대승불교의 패러다임에 대한 ‘갱신’에 상응한다고 판단된다.

인도불교에서 확립된 불성사상을 단순하게 철학적 개념으로써 이해하지 않고, 『육조단경』의 혜능은 그것을 ‘나의’ 몸 안에 있는 자성, 본성, 영성, 본래면목으로 파악함으로써 선문답에 의한 견성, 돈오가 부처를 이룬다는 사상은 매우 혁신적인 사상을 제시했다. 거의 모든 문화체계 속에서 스승과 제자의 문답을 강조해왔지만, 견성의 통로로서 선문답의 고유성은 기존의 논리적인 이해와 경전적인 식견을 끊어내고 단절시킴으로써, 본래면목에로 직입하게 하고, 자성에 직면시키고, 자신의 본성에 날것 그대로 마주 앉게 한다는 점에 있다. 이런 돈오의 방식을 수행의 중요한 한 양식으로 개발한 점은 매우 새롭고 혁신적인 패러다임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론 전통적인 수행체계인 계정혜 삼학에 대해서 육조단경의 혜능은 점차적인 漸修의 입장을 세우지 않고, 급진적인 돈수의 입장을 견지한다. 왜냐면 계정혜 삼학은 이미 자성, 본성에 갖춰진 공덕이고 자질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질서와 평화와 지혜는 ‘개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본성에 온전하게 갖춰진 까닭에 ‘발견’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원래 번뇌는 존재하지 않고, 인연의 결과로서 그대로 곧 깨달음인 것이다. 인도불교의 입장이 점수적인 관점을 대변한다면, 중국의 혜능은 돈오를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육조단경』의 혜능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불교의 탄생을 주도했다고 평가할 수가 있다. 불교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시대가 바뀌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갱신돼온 역사가 아닌가 한다. 지속과 혁신, 보수와 진보, 양자 간의 ‘팽팽한 긴장’이 우리 시대에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가는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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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2017-06-22 16:51:27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통일장이론으로 우주의 모든 현상을 명쾌하게 설명하면서 기존의 이론들을 부정하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나왔는데 과학자들이 침묵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침묵하지 말고 당당하게 반대나 찬성을 표시하고 기자들도 실상을 보도하라! 이 책은 과학과 종교의 모순을 바로잡고 그들을 하나로 융합하면서 우주의 원리와 생명의 본질을 모두 밝힌다. 수학은 현상의 크기를 계산하는 도구에 불과하므로 수학으로 원리를 기술하면 오류가 발생한다.

참된 과학이론은 우주의 운행은 물론 탄생까지 하나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사물의 크기, 장소, 형태와 상관없이 우주의 모든 현상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지 못하는 기존의 물리학이론은 국소적인 상황만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주의 원리를 모르면 바른 가치도 알 수 없으므로 과학이 결여된 철학은 진정한 철학이 아니다. 이 책은 서양과학으로 동양철학을 증명하고 동양철학으로 서양과학을 완성한 통일장이론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