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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은 갈등 상황에서 요청되는 덕목 … 공감하는 관용 교육 필요
관용은 갈등 상황에서 요청되는 덕목 … 공감하는 관용 교육 필요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3.06 15: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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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_ 49강. 김용환 한남대 명예교수의 ‘관용과 신념’

현대사회에서 ‘관용’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닐까. 지난 4일(토)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와 인간의 삶’ 7섹션 ‘윤리의 정신적 차원’ 여섯 번째 강연으로 김용환 한남대 명예교수(철학)가 진행한 ‘관용과 신념: 왜 우리 시대에 관용의 윤리가 요청되는가’가 이에 대한 답을 던져준다.
김용환 명예교수는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영국 웨일즈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 에든버러대 연구교수, 서양근대철학회 회장, 한국철학회 생명윤리연구위원회 위원장, 한남대 부총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한남대 역사·철학상담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관용과 열린사회』, 『홉스의 사회 정치철학』 등이 있고, L.M. 존슨 백비의 『홉스의 리바이어던으로의 초대』 등을 번역했다.이날 강연에서 김 명예교수는 1632년 갈릴레이의 종교 재판과, 1762년 계몽주의자 볼테르가 『관용론』을 집필하는데 자극받은 칼라스 재판 사건을 예로 들면서 관용과 신념의 문제를 풀어나갔다. 
그는 “관용은 다른 도덕적 가치들과 마찬가지로 실천이 요구되는 덕목으로 그 실천은 높은 수준의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가장 일상적인 삶의 현장, 구체적인 상황에서 선택하고 행동할 것을 요청하는 실천적 가치”라고 주장했다. 경청할 만한 지적이다. 강연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신념들 간의 충돌은 불관용을 낳고 불관용은 거부와 배제 그리고 더 나가서 폭력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불관용 현상은 여러 곳에서 목격되며, 그 희생자가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는 위험성은 언제나 상존한다. 정치적 불관용의 아픈 경험을 겪은 세대들에게는 더더욱 관용의 필요성은 요청된다. 따라서 불관용을 줄이고 관용의 정신을 확장하는 일은 열린사회로 가는 이정표가 될 것이며, 신념들 사이의 충돌을 최대한 피할 수 있는 완충 지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용이란 가치는 어디에서부터 연유된 것인가.

관용이란 무엇인가?

잘 알려진 것처럼, 서양의 근대화를 이끌어 온 네 가지 이념은 자유주의, 개인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이념들이었다. 여기에 윤활유 역할을 한 것이 사회계약론(약속 지키기 정신)과는 관용의 윤리다. 중요한 사실은 불관용의 비극적 체험을 통해 관용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더욱 강조돼 왔으며, 관용적인 사회로 진화해 가는 것이 진보라는 신념을 갖게 했다는 점이다.

왜 관용해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관용해야만 하는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대상에 대해 불관용하는 것이 더 편하고 자연스러운 데 왜 굳이 관용해야만 하는가. 심리적 부담감과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관용을 실천해야만 하는 이유와 그 정당한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관용의 정당화 문제는 『관용주의자들』에서 잘 드러나듯이 근, 현대 철학자들마다 각기 다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몽테뉴는 이성에 대한 회의주의적 태도를 근거로 인간 자신의 “약함과 불안정에 대한 앎이 다른 자아들과의 연대를, 그 자아들과의 동일시를 통한 공감을 창출하기 때문에 관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연구의 자유와 학문진보를 위한 개방사회의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관용이 요청된다고 하는 베이컨 역시 어떤 이론이나 가설도 회의주의적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시행착오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과 수정을 통해 새로운 이론의 가능성이 확장된다는 게 과학철학자 베이컨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여기서 시행착오와 반성 그리고 비판정신이 학문의 진보에 결정적인 요소이며, 이런 진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관용의 정신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밸은 양심의 자유에 근거해서 관용을 정당화한 사람이다. 근대 제일의 회의주의자 흄은 독단주의(dogmatism)의 중독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해독제로 완화된 회의주의를 제안하고 있다. 독단주의, 광신주의와 가장 치열하게 투쟁하는 곳이 종교의 영역이라 보고 흄은 종교적 관용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현대 철학자들 중에 관용의 정당성을 강하게 요청한 사람을 지적하라고 한다면 칼 포퍼를 언급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관용과 지식인의 책임」이라는 글은 압축적으로 관용의 정신을 잘 드러낸다. 그는 과학 이론의 세계에서 반증가능성의 원리가 왜 설득력이 있으며, 열린사회로 가기 위한 사회적 실천 덕목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왜 우리는 관용해야만 하는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대상에 대해
불관용하는 것이 더 편하고 자연스러운 데 왜 굳이 관용해야만
하는가. 심리적 부담감과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관용을
실천해야만 하는 이유와 그 정당한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들 근·현대 철학자들이 왜 관용해야 한다고 말하는지 살펴보면 이들의 주장 가운데는 몇 가지 공통된 키워드가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회의주의, 오류가능성 그리고 비판정신 등이 그것이다. 철학자들마다 관용을 정당화하는 길에는 여러 가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필자는 이미 『관용과 다문화사회의 교육』에서 세 가지로 요약한 바 있다.

첫째 분별력으로부터의 논증이 있다. 불관용의 대가와 관용의 비용 사이에 어느 것이 더 분별력 있는 행동인가를 따져 보고 저비용 고효율의 결과를 초래하는 쪽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분별력으로부터의 논증은 공리주의적 논증 또는 실용주의적 논증이라 할 수 있다. 둘째 합리성으로부터의 논증이 있다. 이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대상에 대해 우리가 관용해야하는 이유가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 위에 있다는 논증이다. 잘못된 신념과 편견으로 불관용하기보다는 나의 오류 가능성을 인식하고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게 더 합리적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셋째, 도덕성으로부터의 논증이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관용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 대상이 소유하고 있는 권리와 자유를 보장해야만 한다는 도덕적 명령 때문이다. 자신이 선택한 종교, 사상, 취미, 학문적 입장, 삶의 방식 등이 의미 있는 것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선택도 존중해야 한다. 이른바 ‘타자 존중의 원리(principle of respect for others)’가 그것이다. 이 원리는 관용을 실천하는 일과 불가분의 의존 관계에 놓여 있다.

신념들 간의 충돌과 관용의 덕목

이제 최근 한국 사회에서 경험하고 있는 여러 가지 불관용의 현상 및 사례들의 배후에 놓여 있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신념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전략으로 관용의 윤리를 제안하고자 한다.

종교적 신념과 관용: 관용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또 가장 많이 논의됐던 주제는 종교적 관용이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종교적 불관용에 따른 갈등과 희생이 가장 많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 준다. 그렇다면 종교적 신념들 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 종교적 관용이 지금보다 더 확장돼야만 할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정교분리의 원칙에 더 충실할 것을 제안한다. 대통령 후보의 종교가 국민들의 정치적 판단에 영향을 주거나, 국회의원 선거에 특정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이 만들어지고 선거에 참여함으로써 정교분리의 원칙이 훼손된 경험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둘째, 종교다원주의와 타자존중의 원리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정신에 더 적합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교육할 필요가 있다. 셋째, 종교간 대화의 지속적인 시도를 제안한다.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 살면서 종교간 대화의 가능성을 보다 높이는 일은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이라 생각된다. 

정치적 신념과 관용: 정치적 신념의 차이가 낳은 정치적 불관용의 현상을 두 영역에서 검토해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정치적 관용의 덕목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남북통일과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해 정치적 관용이 무엇보다 먼저 요청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독일 통일 이후 분단이 만들어낸 이질성을 회복하는 데 얼마나 많은 사회적 갈등을 겪고 있으며, 그 비용 또한 적지 않다는 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둘째, 우리 사회 내부에서 소모적인 정치적 갈등을 부추기는 진영논리의 극복을 위해서도 정치적 관용의 덕목은 요청된다. 정치적 관용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자유와 권리에 대한 확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상대방의 정치적 신념에 동의할 수 없고 또 하고 싶지도 않으며, 억제하고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라도 상대방을 용납하고 자발적으로 부정적 행위를 중지하는 관용적 태도야 말로 다원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덕목이다.
   
사족을 붙이며  

관용은 다른 도덕적 가치들과 마찬가지로 실천이 요구되는 덕목이다. 그리고 그 실천은 높은 수준의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가장 일상적인 삶의 현장 안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선택하고 행동할 것을 요청하는 실천적 가치이다. 그런데 관용은 싫어하고 미워하고 용납하기 싫은 대상과 직면했을 때 요청되는 덕목이기 때문에 그만큼 실천하기 어렵다. 그래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관용은 갈등이 있는 곳에서 필요한 덕목이다. 따라서 관용을 이해하는 데는 갈등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거나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이 말은 갈등관계에 있는 상대방을 제거하거나 부정해야 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갈등 해소’라는 용어보다는 ‘갈등 완화’, ‘갈등 조정’ 또는 ‘갈등 이해’라는 용어법이 더 적절하다. 관용은 이 갈등 상황에서 요청되는 덕목임에 틀림없다. 관용이 갈등의 이런 조건에 적합한 덕목이라면 관용 역시 항상 더불어 실천하며 살아야만 하는 가치다.

관용을 배우고 실천하기에 가장 좋은 공간은 가정 내에서다. 부부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그리고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충돌을 관용의 실천으로 해결하거나 완화하는 훈련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학습 경험이 된다.

관용은 한국 사회의 미래적 가치다. 통일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통일 이후의 우리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위해서, 지역감정이 우리의 정치적 판단을 왜곡시키지 않기 위하여, 성숙한 다문화사회를 위해, 소수자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관용의 윤리는 진보적 가치를 대변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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