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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마다 독창적인 제작 기법 … ‘본질’까지 따라할 수 없는 조선의 유산
지역마다 독창적인 제작 기법 … ‘본질’까지 따라할 수 없는 조선의 유산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 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7.02.18 02: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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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48.분청사기덤벙다완(粉靑沙器粉引茶碗)
▲ 사진⑦ 분청사기덤벙다완 개인소장

지난 2월 3일 전남 고흥군 고흥문화회관에서 ‘동북아 분장분청사기의 변천과 고흥 운대리 분장분청사기의 의미’를 주제로 제3회 고흥 운대리 분청사기 국제학술대가 열렸다. 고흥군이 개최하고 (재)민족문화유산연구원(원장 한성욱)이 주관해 열린 국제학술대회로 한국, 중국, 일본의 陶磁史 관련 연구자들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사진①).

▲ 사진⑨ 덤벙다완 바닥면

이번 학술대회에서 필자의 耳目을 끈 내용은 중국 분장도기의 발생과 전개에 대한 고찰과 우리나라 분청사기의 생성과 일본 茶道文化에 영향을 미친 덤벙분청사기 찻사발의 일본전래에 대한 연구발표였다. 
고흥군은 조선 초기 粉靑沙器를 제작한 도요지가 집중적으로 분포된 지역이다. 과거부터 연구자뿐만 아니라 郡民들의 분청사기에 대한 관심도도 매우 높고 문화재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곳이다. 학술대회 당일에도 방청석에는 일반인들이 대거 참여해 발표 자료집이 순식간에 동이 났다. 지역민의 높은 관심은 단순한 문화재의 사랑을 넘어 애향심과 자긍심을 갖게 하며 지역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 사진⑧ 덤벙다완의 내저면

조선초기 분청사기는 전국적으로 제작됐으며 대체로 지역에 따라 공통되는 기법과 생산지를 표기하거나 한 지역만의 독립적인 기법의 생산품을 제작해 대체로 지역별 생산지 추정이 가능하다. 제작기법도 다양해서 상감기법, 인화기법, 철화기법, 귀얄기법, 박지기법, 조화기법, 덤벙기법 등이 사용됐고 생산된 그릇의 종류 또한 병, 사발, 접시, 제기류 등의 실용기 위주로 매우 다양한 편이다.

이 중에 현대 茶人들에게 각별히 주목 받고 있는 찻사발(茶碗)은 제작기법에 따라서 분청사기상감인화문다완(사진②), 분청사기상감내섬시명다완(사진③~④), 분청사기철화당초문다완(사진⑤), 분청사기귀얄문다완(사진⑥), 분청사기덤벙다완(사진⑦) 등으로 여러 종류다. 이렇게 다양한 분청사기 찻사발 중에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덤벙기법으로 제작된 찻사발에 대해 論하고자 한다.

덤벙분청사기는 철분이 많이 포함된 청자의 태토(흑색이나 회흑색)의 표면에 白土粉粧(흰색 흙을 물에 개어서 그릇의 표면에 칠해주는 것)을 하는 것이다. 백토분장을 하고 燔造를 하면 마치 백자처럼 하얀색의 도자기를 얻을 수 있으며, 청자토로 번조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지역에 따라서 백토분장을 굽바닥 밑까지 완전히 하는 것(완전덤벙분청사기)과 그릇의 반 정도만 하는 것(반덤벙분청사기)으로 나눈다. 이 중 특히 귀하게 여기는 것은 완전덤벙분청사기로 일본의 茶人들은 ‘粉引’이라 했으며, 수백 년 傳世돼온 유물이 개인이나 일본의 여러 기관에 소장돼 있다(사진⑫ ⑬ ⑭).

(사진⑫)의 덤벙분청사기다완은 수백년간에 걸쳐서 전세돼온 찻사발로(三好長慶-豊臣秀吉-金森宗和-三井本家-酒井家-三井家) 임진왜란의 주역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은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大名物’로 간주된다. 16세기 조선의 전라남도지방(고흥, 보성, 무안)에서 제작된 덤벙분청사기찻사발이 일본에 수입돼 수백년동안 소장한 소장자들의 명성과 의미를 덧붙여 찻사발의 본질보다는 자신들의 소유과정을 더 부각시켜서 전혀 새로운 遺物로 탈바꿈시키는 일본인의 방식이 가미된 것이다. (사진⑫)나(사진⑬) 역시 傳世品으로 같은 과정을 거친 것이며 찻사발에 ‘三好’, ‘楚白’, ‘???山’이란 이름도 붙인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수입품을 국산품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같은 시기에 같은 工房에서 같은 도공이 제작한 (사진⑦)의 분청사기덤벙찻사발은 出土品으로 ‘無名’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용돼 왔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찻사발의 본질은 그대로이며 일본의 방식을 덧붙일 필요도 없다. 우리 조상이 직접 만든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사진⑦)은 역시 전라남도의 고흥, 보성, 무안지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덤벙기법의 찻사발로 처음 공개되는 유물이다.

그릇의 내저면이 깊고 입지름은 14cm~14.5cm로 적당하며 높이는 6.5cm이다. 굽 높이는 0.8cm이고 굽 지름은 5.5cm이다(사진⑧~⑨). 백토분장이 바닥 굽까지 두텁게 됐으며 몸통의 선이 유려하다. 골고루 시유된 유약의 표면은 미세한 빙렬이 가득하며 器壁의 ‘窓’(일본의 다인들은 이것을 ‘풍경’이라 하여 귀하게 여겼고 우리는 ‘窓’이 열린 것이라 하여 명품의 조건이 된다)은 3.7cm로 알맞게 열려있다. ‘窓’은 찻사발을 백토분장할 때 생기는 것으로 찻사발에서 가장 자연미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사진⑩).  바닥 굽에는 부분에 가는 모래받침의 흔적이 남아있어(대부분은 내화토 받침을 사용한다), 정성들인 흔적을 엿 볼 수 있으며 모래받침의 사용은 보성 도촌리 가마터에서도 간혹 나타난다(사진⑮).

현재까지 일본의 건물터에서 출토된 덤벙분청사기찻사발은 한 점도 없고 확인된 일본에 소장된 덤벙분청사기찻사발은 모두 28점에 불과하다. 국내에도 현존수량이 적고  귀한 유물로 간주된다.
차를 좋아하는 茶人뿐만 아니라 누구나 한번은 두 손에 꼭 쥔 찻사발에 말차 한 모금 마시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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