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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쟁점] 현 단계 우리 장편소설의 상황과 위상
[문화쟁점] 현 단계 우리 장편소설의 상황과 위상
  • 교수신문
  • 승인 2002.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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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경/문학평론가

필자가 교수신문사측으로부터 받은 원고청탁서에는 이 원고의 기획의도를 “올 여름·가을 황석영의 장편소설 ‘손님’으로 한국문학의 노벨문학상 진출에 대한 말들이 많았”던 것과, 프랑스 쇠이유사의 주간 벵상 바르되의 노벨문학상 후보조건에 관한 언급을 계기로 “현재 우리 장편소설의 상황과 위상, 그리고 왜 장편소설의 입지와 힘이 줄어들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노벨상 문제로부터 촉발된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는 작품의 문학적 가치 이외에 노벨상 수상작을 결정짓는 여러 요소들, 이를테면 번역의 문제 등에 대한 지적이 빠져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청탁자의 의도는 우리의 장편소설들이 문학적 역량이라는 측면에서 만족할만한 질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더불어, 현재 장편소설들의 위상이 점차 위축돼가고 있는 현상을 진단해달라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 유일하게 시장성 있는 장르

전자의 문제제기가 장편소설들의 문학적 성취에 대한 내적 평가와 관련된 것이라면, 후자는 장편소설을 둘러싸고 있는 외적인 상황변화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후자의 문제제기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논란의 가능성부터 짚어보기로 하자. 보는 관점에 따라서 현재 장편소설의 입지와 힘이 줄어들고 있기는커녕, 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장편소설이라는 반박이 바로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시가 쇠퇴해가는 뚜렷한 조짐과는 반대로 소설은 문학출판시장에서 아직까지 거의 유일하게 시장성을 갖춘 장르로 인식되고 있고, 출판 상업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중단편 소설들보다는 오히려 보다 풍성하고 드라마틱한 서사를 기대할 수 있는 장편소설이 권장되는 추세이기도 하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더군다나 생업을 포기하고 창작에만 전념하는 전업작가들이 점차 늘고 있다는 점 또한 보다 지속적인 시간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장편소설들의 생산을 부추기는 요인이기도 하다. 물론 최근 들어 대하소설의 생산과 소비는 확연히 감소해가는 추세인 듯하다. 독자들로부터 광범위한 호응을 얻었던 ‘태백산맥’ 이후 대하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취향이 시들해져가고 있고, 대하소설의 생산 또한 그 활력을 잃어가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제 대하소설의 시대는 갔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장편소설이든 대하소설이든 소설이 처해 있는 상황은 현재 문학이 놓인 사회문화적인 위상의 문제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장편소설이 점차 그 활기와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는 인상 역시 넓게는 사회문화적인 영역 내에서, 좁게는 출판시장 내부에서 문학의 입지가 점차 약화돼가고 있는 현상황에 대한 인식과 암암리에 상호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장편소설이 여전히 시장성이 있는 장르라고 하더라도 그 시장성의 규모란 결국 점차 위축돼가는 문학시장에 한정돼 있는 것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장르 자체의 시장성이 그대로 작품의 문학성을 담보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시장성의 문제가 현재 생산되고 있는 장편소설들에 대한 질적 가치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장은 좁아지고 있지만, 전업작가들의 수는 늘고 있는 현재의 특이한 상황 속에서 장편소설들의 생산이 이전에 비해 수적으로 감소했다는 뚜렷한 조짐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생산되고 있는 작품들 속에서 장편소설 특유의 풍부하고 웅숭깊은 서사의 폭과 깊이를 지닌 작품들의 목록을 머릿속에 풍성하게 떠올리기란 쉽지 않은 일인 것 또한 사실이다. 비단 최근의 소설들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문학사를 통털어 보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듯 싶다. 간혹 주위 사람들에게서 세계문학전집을 읽다가 한국문학작품들을 읽으면 뭔가 협소하고 정형화된 상상력의 틀에 갇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도 문학 안팎의 독자들이 한국소설 전반에 대해 느끼는 불만의 한 표현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불만의 이면에는 외국의 선진 문물은 선망하면서 우리 것을 인정하는 데는 몹시 인색한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심리적 편향이 작용한 측면도 없지 않겠지만, 한국문학의 질적 성취에 대한 불만이 어느 정도 현실적인 근거를 지니고 있다면, 그 근본원인은 한국 근대소설이 형성되게 된 태생적 조건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무정’을 쓸 무렵의 이광수가 그랬듯이, 급격한 전통 단절 및 근대적 삶으로의 전환이라는 민족 계몽에의 요구로부터 시작된 근대 이후의 한국소설은 계몽의 양식으로 독자들을 선도하는 문화의 중심적 담론으로서의 권위를 누린 반면, 도덕적 엄숙주의나 삶에 대한 협소한 윤리적 관점의 틀 안에서 암암리에 보다 자유로운 상상적 운신의 폭을 제한받아온 측면 또한 없지 않다. 문학이 독자들을 교화하고 독자들에게 시대적 삶의 지침을 제공하는 계몽의 양식이 돼야 한다는 의식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지배해온 격동기적 상황 속에서 작가들에게 부과된 역사의식의 요구와 상호작용하면서,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에서 말미암은 풍부한 문학의 소재와 창작의 에너지가 탄력적이면서도 다채로운 미학적 성취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약하는 기제로 작용해왔다는 혐의를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희열의 절정까지

필자가 판단컨대, 우리의 문학에 좀 더 필요한 것은 도덕적 계몽에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극단의 상상력인 듯하다. 한국소설들이 대립된 힘들 사이의 갈등과 긴장을 잘 견뎌내지 못하고 쉽사리 도덕적이거나 계몽적인 관점의 화해가능성에 안주하는 중용의 상상력을 즐겨 보여주는 것은 한국 소설에서 독자들이 체험할 수 있는 정서적 스펙트럼의 폭이 매우 빈곤하다는 점과도 일정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앞으로 갈등과 긴장의 에너지를 극단까지 밀고 가는 과정을 통해, 절망의 밑바닥에서 희열의 절정까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내적인 체험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아울러 철학적 사유의 웅숭깊은 심연을 펼쳐보이는 장편소설의 출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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