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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을 찾아서
녹색을 찾아서
  • 박아르마 건양대 불문과
  • 승인 2016.06.0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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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신록의 계절은 때이른 더위에 벌써 초여름으로 치닫고 있다. 이제는 캠퍼스 어딜 가도 푸르름이 차고 넘친다. 그러고 보면 우리대학의 상징색도 녹색이다. 신록의 계절에 서구사회와 문학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녹색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 녹색은 서구 유럽의 색이라기보다는 이슬람의 색이다. 이슬람의 종교와 문화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녹색은 풍요와 예언자 무함마드를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다. 이슬람 국가들의 국기에 유독 녹색이 많이 사용된 것도 그런 상징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015년의 프랑스는 테러로 점철된 한 해였다. 1월 7일 풍자 잡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공격이 있었고 같은 해 11월 13일 130명의 희생자가 생긴 ‘파리 테러’가 일어났으니 말이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되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묘사한 풍자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슬람교의 창시자를 성적으로 희화한 것은 물론이지만 풍자화의 배경이 녹색인 것에 주목하게 된다. 녹색이 이슬람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이미 말했지만 그들의 건축물과 의상, 문화 속에서 볼 수 있는 푸른색은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색채다. 반면에 풍자화의 배경이 된 녹색은 생기 없고 단조로우며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인공의 색에 불과하다. 따라서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화는 이슬람교는 물론이고 이슬람 세계까지도 이중으로 모독한 셈이다. 프랑스의 통계 인류학자 엠마뉴엘 토드는 <샤를리 에브도> 사건을 분석한 『샤를리는 누구인가』(2015)에서 프랑스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소수 집단의 종교를 그런 식으로 풍자하고 모욕한 것이 과연 정당한 행동이었는지 묻고 있다. 그는 프랑스가 공화국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고 이슬람 국가 출신 이민자들을 포함한 자국 내 모든 민족과의 동화정책을 지지한다. 물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것이 오늘날 프랑스의 현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올해 초 타계한 프랑스의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도 『황금 물방울』(1986)에서, 사하라 사막에서 건너온 ‘이드리스’라는 소년의 시선을 통해 서구의 물질문명을 비판하고 그 대안을 이슬람의 정신에서 찾고 있다. 작가는 서구의 문명은 사물의 본질과 실체를 왜곡하는 이미지로 이뤄져 있고 이슬람의 문명은 청각과 몸의 느낌을 중시하는 기호의 세계에 속한다고 보았다. 이미지는 자신의 형상을 보는 사람을 돌로 변하게 만드는 메두사와 같이 악의적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에 해독제처럼 사용될 수 있는 것이 동양과 이슬람의 기호라는 것이다. 투르니에는 서구 작가들 중에서는 드물게 이슬람의 서예, 즉 칼리그래피에 나타나 있는 상징성과 아름다움에 주목했다. 소설에는 아랍의 전설적인 여가수의 공연을 듣고 싶어 하는 맹인이 등장한다. 그는 가수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청각을 통해 자신이 듣는 노래의 색채가 녹색이라고 말한다. 그는 청각에서 시각적인 것을 읽어낸 것인데 그가 찾아낸 녹색은 물론 예언자 무함마드의 색이다.

서구문명의 마지막 보루였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메흐메트 2세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에 입성할 때 손에 들고 있던 깃발의 색이 녹색이고 보면 이슬람을 상징하는 이 색이 서구인들에게 두려움과 터부의 대상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할 법하다. 하지만 서구의 많은 문학작품들에 등장하는 녹색이 꿈과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낭만적으로도 묘사된 것을 보면 녹색을 그리 터부시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소설가 쥘 베른의 『녹색 광선』(1882)에는 해가 수평선에 질 때 섬광처럼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녹색의 빛을 찾아 등장인물들이 스코틀랜드의 섬들을 돌아다니는 낭만적인 꿈과 모험이 그려져 있다. 동명의 소설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누벨바그 영화의 거장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 「녹색 광선」도 녹색을 꿈과 희망을 가져다줄 색채로 해석한다.

현대소설 중에서 녹색을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묘사한 작품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1925)일 것이다. 개츠비는 롱아일랜드의 맨해셋灣을 사이에 두고 있는 옛 애인 데이지의 집 건너편에 저택을 짓고 밤마다 요란한 파티를 벌인다. 하지만 그는 늘 혼자가 돼, 해협 건너편에 있는 옛 애인의 집 부두 끝에서 늘 반짝이는 녹색의 불빛을 바라본다. 그는 “오직 녹색의 불빛만을 믿었다.”
생각해보면 녹색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이슬람의 상징으로도, 희망과 그리움의 불빛으로도 받아들여진다. 자연의 색을 저마다의 이념적 색채에 따라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는 현실을 보면 녹색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 자체가 조심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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