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9 00:05 (월)
화폐반란·가치실체론 겨냥 “경제학 토대 다시 세우자”
화폐반란·가치실체론 겨냥 “경제학 토대 다시 세우자”
  • 교수신문
  • 승인 2016.05.31 11: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을 말하다_ 『가치의 제국』 앙드레 오를레앙 지음|신영진·표한형·권기창 옮김|울력|383쪽|20,000원

 

오를레앙은 경제학의 전통적 담론을 量의 경제학 또는 가치실체론이라
이름하고 있다. 가치실체론은 상품-화폐의 교환과정을 배제하고, 교환과정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실체를 도입해 상품사회의 구성원리를 설명하고자 하는 접근을 일컫는다.
오를레앙의 입장에서 가치는 상품-화폐의 교환과정에서 구성된다.

앙드레 오를레앙(Andre Orlean, 1950~) 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조절이론가 중 한 명이면서 꽁방시옹(convention) 경제학을 수용해 경제와 제도의 관계를 주로 연구해온 이론가다. 그는 사회 구성원들 간에 공유된 믿음으로 정의할 수 있는 꽁방시옹 개념을 중심에 놓고, 금융시장의 작동원리를 해명한 『금융 권력』(1999), 화폐이론의 재구성을 목적으로 한 『폭력과 신뢰 사이의 화폐』(2002) 및 지난 2007∼2008년의 금융위기를 분석한 『금융 도취에서 금융 위기로』(2009)에서 이미 경제학의 전통적 담론에서 벗어나 이단적 사유를 선보였다. 오를레앙은 이제 『가치의 제국』에서 ‘경제학의 토대를 다시 세우자’는 대담한 기획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기획의 중심에는 가치실체론에 대한 비판과 화폐에 대한 성찰이 놓여 있다.

가치실체론 비판
경제학의 연구대상은 무엇인가? 교과서적인 답변은 이렇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고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켜 줄 자원은 희소하므로 수단과 목적의 괴리에 따른 선택의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이 경제학이다. 이렇게 선택의 문제로 정의된 경제학은 가족경제학이나 범죄경제학 같은 연구주제의 확장이 보여주는 것처럼 경제학의 제국주의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사회과학의 보편적 방법을 제공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교과서적 답변을 밀쳐 두고 사회적·역사적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경제학은 ‘사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富의 축적 논리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과 같은 무정부 상태로 나아가지 않고 어떻게 일정하게 조정돼 질서를 형성하는가’라는 근대 상품사회의 구성 원리에 대한 탐구를 해왔다. 물론 이 질문은 사회학이나 정치학 같은 다른 사회과학에서도 공통적으로 다뤄온 문제라는 점에서 분과학문으로서 경제학의 특수성은 이러한 질문보다는 그 답변, 즉 상품적 조절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부여 받고 있는 가치 개념의 특수성에 있다. 달리 말해 사회적·윤리적·종교적 가치들과 달리 경제학적 (상품)가치는 계산 가능한 양적 크기로서 제시된다는 사실에 의해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오를레앙은 경제학의 이러한 전통적 담론을 量의 경제학 또는 가치실체론이라 이름하고 있다. 여기에서 가치실체론은 상품-화폐의 교환과정을 배제하고, 교환과정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실체를 도입해 상품사회의 구성 원리를 설명하고자 하는 접근을 일컫는다. 이 점은 효용이라는 실체를 도입하고 있는 신고전학파의 효용가치론은 물론이고, 고전학파 경제학에서 기원해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정점에 도달한 노동가치론도 노동이라는 실체를 도입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반면 오를레앙의 입장에서 가치는 교환과정 이전에 주어지고 상품-상품의 교환과정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상품-화폐의 교환과정에서 구성된다.

『가치의 제국』에서 가치실체론에 대한 비판은 신고전학파 가치이론의 전형인 레옹 발라스(Leon Walras)의 일반균형이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구체성을 획득하고 있다. 발라스 일반균형이론은 효용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주체를 상정하면서 분석을 시작한다. 이 공리주의적 주체의 욕망은 (1)객관적이고, (2)볼록성을 가진다고 가정된다. 욕망의 객관성은 타자의 행위에 의해 주체의 욕망이 영향 받지 않는다는 것이고, 욕망의 볼록성은 예를 들어 특정한 재화에 욕구가 고착되는 극단적인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정 하에서 가치는 재화의 고유한 효용으로 나타나는 자명한 양적 크기로 파악되며, 신고전학파 이론은 균형이라는 개념을 통해 상품 질서의 형성, 즉 행위 주체들의 욕망이 서로 양립하는 가격체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이때 효용이라는 가치실체는 주체의 욕망과 행위를 안정적으로 구조화하는 통합의 규제자로 등장한다. 이러한 발라스 일반균형이론에 대한 오를레앙의 비판은 (1)화폐를 배제하고 물물교환을 중심에 놓고 있다는 것 (2)주체의 욕망을 불변적이고 외생적으로 바라본다는 것 (3)가치 크기의 양적 결정은 그 총체성 때문에 복잡성을 가진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그리고 오를레앙은 量의 경제학에 대립하는 관계의 경제학을 통해 가치실체론을 지양하면서 가치의 자율성을 사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치에 실재적 힘 부여하는 ‘화폐’
오를레앙에게 화폐와 가치는 동일한 현실의 두 얼굴이고, 이 두 측면은 분리되지 않는다. 화폐는 사회 구성원 전체에 의해 수용되고 승인되는 과정에서 가치에 실재적인 힘을 부여한다. 환언하면 화폐를 통해서 가치는 사회적 성격을 획득하며 사회적 준거로 작동한다. 이 점에서 관계의 경제학이라는 틀에서 파악된 가치의 자율성은 가치실체론에서처럼 순수한 독립성과 외재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행위 주체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지만, 그 상호작용으로 환원되지 않는 경제 제도의 자율성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그렇다면 관계의 경제학은 어떤 개념적 토대 위에 자리 잡고 있는가.

『가치의 제국』은 화폐 현상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유추할 수 있는 개념의 향연을 준비하고 있다. 우선 르네 지라르의 종교인류학에서 가져온 모방욕망,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 가져온 다중의 힘, 뒤르켐의 사회학에서 가져온 사회적인 것의 힘·권위라는 개념들을 통해 화폐를 욕망하도록 사회 구성원들을 끌어당기는 힘의 근원을 분석한다. 오를레앙이 특히 주목하고 있는 이 개념들은 구성원의 열망과 정서를 투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집단적 표상·믿음이라는 동형적 차원을 가진다. 그리하여 성스러움이라는 종교적 가치, 규범이라는 윤리적 가치, 권위라는 사회적 가치, 화폐가 표현하는 경제적 가치를 동일한 개념틀로 분석할 수 있다. 사회과학의 여러 분과학문이 공유할 수 있는 분석적 관점을 구성한다는 통합 분과적 틀에 대한 전망은 이러한 유추에서 비롯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화폐의 형성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이해와 분석틀도 제공한다. (1)유동성을 가진 어떤 대상이나 상징이 화폐의 지위로 오르는 과정, (2)화폐적 대상이 사회적으로 인정된 제도의 지위를 획득하는 과정, 나아가 (3)지불수단의 역할을 하는 화폐가 계산 단위, 가치 저장 수단, 교환 수단으로 역할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이 대상이 된다. 이를 위해 (1)내적 매개의 상호작용에 의한 화폐선출, (2)내적 매개에서 외적 매개로의 이행, 즉 자기-외재화 과정, (3)외적 매개라는 분석틀이 동원된다. 화폐의 자율성과 등가적인 가치의 자율성은 자기-외재화를 통해 외적 매개의 대상이 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고, 앞서 말한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지양이라는 관념도 외적 매개의 상호작용에 대한 분석을 통해 성취한 부분적 성과를 포괄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끝으로 『가치의 제국』은 신고전학파적 관점에서 결여된 화폐 질서의 위기를 분석할 수 있는 개념들도 제공한다. 이것은 오를레앙의 분석틀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강점이기도 하다. 화폐반란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위기는 기존 화폐 질서의 정당성이 의문시되고, 사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행위 주체들의 갈등이 조절되지 못할 때 화폐 제도를 변경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화폐반란은 초기단계에서는 물가지수와 환율을 통한 화폐가 표상하고 있는 집단적 힘의 상대화라는 형태로, 나아가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으로 귀착하기도 한다. 이러한 화폐적 반란은 상품 질서를 안정적으로 구조화하는 힘들에 대한 반작용의 가능성을 열어 둔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경제학이 커다란 전환기에 놓여 있다는 『가치의 제국』에 개진된 오를레앙의 생각은 세계사적 흐름과 동시에 한국적 상황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좀 더 사회학적이고 좀 더 인류학적인 지평에서 ‘경제학의 토대를 다시 세우자’는 진단은 우리에게도 유효한 진단일 것이다.

 

표한영 중소기업연구원·경제학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소기업연구원에 재직 중이며, 화폐 및 금융에 관한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