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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합정체’론, 오늘의 정치사회 개선에 유용”
“‘혼합정체’론, 오늘의 정치사회 개선에 유용”
  • 교수신문
  • 승인 2016.04.06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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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와 인간의 삶’_ 5강.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국가의 현실, 개인의 현실’

 

지난 2일(토)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시즌3 윤리강연은 1섹션 ‘국가와 윤리’의 마지막 차례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국가의 현실, 개인의 현실’을 주제로 진행했다. ‘윤리’를 좀 더 거시적인 국가의 일 속에서 ‘정치윤리’로 읽어낸 강연이었다.
이날 강연에서 최장집 교수는 노련한 정치학자답게 작금의 정치사회를 개선하는 좋은 길잡이로 아리토텔레스의 ‘혼합정체’이론을 시해 눈길을 끌었다. 최 교수는 “정치와 개인의 관계에서 안전과 평화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불러냈다. 그는 “인간은 최고의 선인 평화를 얻기 위해 ‘합일의 계약’이라고 하는 사회계약을 체결하는데, 이 사회계약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리바이어던으로 상징되는 ‘인공으로 만들어진 가공물’, 즉 국가”라고 설명했다.

이 ‘인공으로 만등러진 가공물’인 국가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의미가 다양하게 변해왔다는 점에 주목한 최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 베버의 ‘국가’를 환기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미한 도시(국가)는 국가와 사회 간의 경계가 없던 ‘일종의 공동체’였다면, 막스 베버는 사회와 분명한 경계를 가지며 특유의 정치적 기능을 갖는 대규모적인 행정관료체제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최 교수는 여기서 중요한 문제로 국가가 팽창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만큼 국가의 팽창과 국가로의 권력집중이 빠른 속도로 이뤄진 나라는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종전 이후 분단국가의 건설과 국가중심의 빠른 산업화는 민주화와 산업화 이전에 잘 발달된 행정관료체제에 기반을 둔 강력한 국가와 국가주의로 발전해 권위주의로 이어진 오늘날 국가중심적 정치환경을 만들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빠른 속도로 국가로의 권력집중이 진행된, 국가중심적 정치환경을 가진 오늘의 한국사회에 어떤 이론이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최 교수는 주저 없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체’이론을 제시했다. 최 교수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체’이론의 중요한 원칙은 하나의 부분이 전체공동체를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각 정치체제가 지닌 장점들을 취합해서 좋은 정치체제를 만든다는 아이디어다. ‘각 정치체제가 지닌 장점들을 취합해서 좋은 정치체제를 만든다’는 대목은 분명 귀가 솔깃하다.

그가 이러한 아이디어에 주목한 데는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가치의 수용’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작용하는 듯하다. “오늘날 한국정치가 서있는 사회구성의 특징은 국가가 압도적 힘의 중심으로서 사회전체를 일원주의적 권력구조를 통해 이끌어가는 데 있다. 이러한 일원주의는 강력한 국가와 국가주도의 산업화를 통해 창출되고 급성장한 재벌 중심의 대기업집단이 국가권력과 결합하게 됐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현실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최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체’의 비전에서 한국의 사회구성과 정치체제를 다원적 구조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거듭 읽어내게 된다.

그는 강연 끝머리에서 시민사회의 정치영역에 새로운 사회적 힘들이 진입하는 것에 기대를 걸었다. 이러한 힘의 진입이야말로 ‘혼합정치체제’를 발전시키는 동시에, 한국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사회적 힘이 조직화된 형태로 정치영역의 제도권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문턱’이 낮아야 한다.” 그가 말하는 새로운 사회적 힘들은 기존의 정당체제 안으로 진입할 수 없었던 사회적 약자, 소외자, 사회적 계층구조의 하층에 위치한 사람들, 여러 형태의 정치적·이념적 억압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있는 사회집단들이다. 이들이 제도화된 정치영역, 특히 정당 간 정치경쟁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되면, “정치영역을 확장하는 효과를 동반하게 되”며, “전환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큰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게 최 교수의 결론이다.

 

최장집 교수 강연 결론 부분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이제 강연은 결론에 이르렀다. 이 강연에서 헤겔의 ‘윤리적 생활/윤리성’을 중심주제의 하나로 설정하게 된 것도 한국사회의 윤리적 현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며 그것을 개선해 보려는 희망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사회의 문화적·정신적·윤리적 상황은 국가, 시민사회, 가족 모두가 각 영역에서 이러한 윤리성을 담을 수 있는 제도로서 제구실을 하고 있지 못하다. 이점에서 볼 때 한 사회에서 윤리적 생활을 바로 세우는 문제는, 윤리 그 자체로부터 해결책을 발견하려 하기보다, 그러한 윤리적 생활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내지 윤리적 생활을 위한 사회적 환경을 바로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국가권력의 확대는 대기업의 팽창과 궤를 같이했고, 그리고 국가와 대기업의 결속 내지 연대는 한국사회전체,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생활의 모든 영역, 모든 수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됐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시민사회의 피폐화, 허약함과 맞물리게 됐다. 이런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성격은 추상적 다수의 지배로 특징될 수 있다. 정당의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특정의 정책은 그 정책으로 혜택을 받는 사람들의 자유를 증진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은 그 정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직접 그 정책결정에 어떤 형태로든 간여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이 합리적인 자기결정을 할 수 있는 자유의 의지를 자각할 수 있는 기회는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체(mixed regime/ mixed government)’ 이론이 오늘의 한국정치, 나아가서는 한국사회를 개선하는 문제를 생각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무엇이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정치체제인가에 대해 탐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체의 아이디어에서 제일 중요한 원칙은, 하나의 부분이 전체공동체를 지배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 것이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혼합의 원칙들만 제시하는데, 한마디로 과두정체와 민주정체의 중간(to meson)을 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듯 보인다. 혼합정체의 이론은 현실에서는 어떤 정치체제이든 완전한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각 정치체제가 지닌 장점들을 취합해서 좋은 정치체제를 만든다는 아이디어다.

오늘날 한국정치가 서있는 사회구성의 특징은 국가가 압도적 힘의 중심에 서서 사회전체를 일원주의적 권력구조로써 이끌어가는 데 있다. 이 일원주의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국가와 국가주도의 산업화를 통해 창출되고 급성장한 재벌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집단이 국가권력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현실에서 한국사회의 절대적인 지배 권력이라 하더라도 민주주의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는 동안 시민사회는 민주화와 더불어 민주주의가치의 진원지이고 기반으로서 형성되면서 새로운 사회영역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민주주의의 기질은 강하다 하더라도, 그들의 열정, 에너지를 자율적 결사체와 정당의 방식으로 제도화 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체’의 아이디어로부터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앞에서 말한 세 종류의 힘의 중심 또는 힘의 원천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의 사회구성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체제를 다원적 구조로 발전시킬 수 있는 어떤 비전이다.

그렇다면 ‘혼합정체’의 퍼스펙티브를 통해 현재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일괴암적 힘의 구조가 3자구조로 변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온다고 한다면, 그로부터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각기 힘의 중심이 지니는 특징적 장점, 즉 각 책무와 덕성 (virtue)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를 추동하는 것을 뜻한다. 한국사회의 조건에서 국가가 변화의 중심이 될 수 있나.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부정적이다. 국가는 사회경제적 성장의 총량지표를 중심으로 한 양적성장지상주의와 이를 효율적, 효과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기술합리성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는 것을 벗어나기 어렵다. 현재의 일괴암적 권력중심이라는 조건에서 어디로부터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까. 그것은 필연적으로 시민사회로부터, 특히 정치적으로 조직화된 시민사회의 영역인 정치영역에서 정당의 변화에서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서구 선발 민주주의 국가들의 사례를 보더라도 어느 나라의 민주화의 과정이든, 그 이전에 대표되지 못했던 사회적 힘이 처음부터 정치의 제도권 안으로 들어온 사례는 없다. 신생민주주의국가로서 한국이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의 역사적 궤적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힘이 조직화된 형태로 정치영역의 제도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문턱’이 낮아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의 제도로서는 기존의 정당체제 안으로 진입할 수 없었던 사회적 약자나 소외자, 사회적 계층구조의 하층에 위치하는 사람들, 여러 형태의 정치적 이념적 억압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있는 사회집단들, 그리하여 잠재적 이익, 잠재적 이슈로 남아있었던 것들이 제도화된 정치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것, 顯在化된 이익과 이슈가 돼 정당 간 정치경쟁의 중심으로 들어오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것은 곧 정치영역을 확장하는 효과를 동반하게 된다.

시민사회의 정치영역에서 새로운 사회적 힘들의 진입은 혼합정치체제를 발전시키는 것과 아울러 한국사회가 변화할 수 있는 극히 중요한 시작이 된다. 정치의 올바른 제도변화는 또한 이러한 시작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헌법 개정이나, 어떤 근본적 개혁을 표방하는 큰 개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법과 제도를 만드는데 영향력을 갖는 사람들이 합의할 수 있다면, 큰 어려움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변화는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전환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큰 변화의 시작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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