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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통신원리포트 : ‘한국 뉴시네마영화제’ 둘러싼 영국 문화계의 반응
해외 통신원리포트 : ‘한국 뉴시네마영화제’ 둘러싼 영국 문화계의 반응
  • 이택광 영국통신원
  • 승인 2002.12.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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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07 10:19:31

영국에서 지금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종전과 달리 이런 관심이 학계 안팎에서 골고루 부각되고 있다는 점에서 영국에서 지금 일고 있는 한국영화 붐은 과거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올해 깐느와 베니스 영화제에서 한국영화의 예술성을 인정받았던 한국영화가 이제 바야흐로 유럽의 일반 영화관객들에게도 호소력 있는 소통 코드를 갖추게 됐다는 진단이 그렇게 성급하게 들리지 않는다.

지금 문제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두 영화제는 ‘런던영화제’와 ‘한국뉴시네마영화제’다. 그러나 바람의 강도로 보자면, 후자 쪽이 더 위력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흥미롭게도 이번으로 46회가 되는 런던영화제에는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를 비롯한 묵직한 영화들이 주로 상영되는 한편, ‘한국의 뉴시네마’란 주제로 작년부터 개최돼 왔던 제2회 한국뉴시네마영화제는 런던, 맨체스터, 셰필드, 에든버러, 브리스톨, 옥스퍼드, 케임브리지에서 곽재영 감독의 ‘엽기적인 그녀’를 필두로 한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조심스럽게 선보이고 있다.

런던영화제는 비록 비경쟁영화제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국적의 영화 속에 한국영화가 부분적으로 참가하는 형국인 반면, ‘한국뉴시네마영화제’의 경우는 주영한국대사관의 재정지원을 받아서 셰필드대 동아시아학과(학장 제임스 그레이슨 교수)가 의욕적으로 펼치는 사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영화제를 작년부터 기획하고 책임을 맡아온 이향진 셰필드대의 동아시아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외국에 나오는 한국영화는 한국적인 것을 대표하는 것에 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한국적인 것을 애써 만들어서 선보이려고 하는 노력도 좋겠지만, 오히려 지금 한국대중들이 즐기고 소비하는 영화 자체가 가장 한국적인 것일지도 모르지 않겠는가”하고 이 영화제의 취지에 대해 운을 뗀다. 과거에 사라진 정체성을 발굴하는 것 못지 않게, 오늘날 살아 움직이는 한국 자체를 보여주는 것도 호소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산물인 영화에서 일찌감치 예술과 산업은 통합되거니와, 아도르노는 이를 염두에 두고 예술형식 자체에 내재한 법칙과 근대적 이성의 도구화를 연결시키면서, 예술의 소멸을 경고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사실에 더욱 접근해가려고 하는 모방과 복제의 자기 실현 욕구가 예술의 운명을 종언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영화는 예술의 지옥이라고 할 만하다. 영화에 이르러, 예술은 복제와 모방의 극점에서 산업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발 비켜서서, 아도르노의 개탄을 살짝 뒤집어 본다면, 영화라는 형식은 오히려 이런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이분법이 소멸해버린 ‘새로운 자본주의 단계’를 표시하는 징후로 읽어도 무방할 것 같다.

‘한국뉴시네마영화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두 번째로 개최되는 영화제를 “예비적 단계”라고 말하는 큐레이터 이향진 교수는 이렇게 상대적으로 복잡하고 진지한 영화들 틈에 슬쩍 ‘엽기적인 그녀’와 같은 작품을 끼워놓음으로써 발생하는 효과를 분석함으로써, 한국영화가 과연 낯선 유럽인과의 소통코드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한번 점검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런 영화제에 대한 이향진 교수의 소망은 관객들의 반응에서 그 실현여부가 판가름날 것이고, 지금까지의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이런 소망이 절반은 달성된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특히 ‘엽기적인 그녀’에 대한 십대와 이십대 초반 젊은 영국관객들의 반응은 아주 긍정적이었다. 최근 영화시장에서 로맨틱 코미디의 강세를 반영이라도 하듯, ‘엽기적인 그녀’는 젊은 영국관객들의 마음을 충분히 사로잡았던 것이다. ‘JSA’나 ‘정’과 같은 다소 무거운 한국적 주제를 다룬 영화들을 주로 선보였던 작년의 경우에 비한다면, 올해 영화제는 성공적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동물학대방지법에 저촉돼, 이미 초청된 김기덕 감독의 ‘섬’이 개봉되지 못한 점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에 대해 관계자는 원주민 학살을 다룬 영화는 상영할 수 있으면서 영화 주제 구성의 부분으로 사용된 주요 장면을 문제 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또한 아도르노가 제기한 합리성의 자기 구속성에 따른 결과일까.

여하튼, 이런 한국영화 붐에 부분적으로 힘입어, 최근 영국학계도 서서히 한국대중문화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는 추세다. 태권도와 색동옷으로만 표상돼 왔던 한국의 이미지를 재고시키는 이런 새로운 관심은 지구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현재의 한국을 서구인들에게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이와 같은 관심에 상응할 만한 ‘내용’이 우리에게 마련돼 있는가 하는 질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질문은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대중문화의 흐름을 학문적으로 품어내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대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영국에서 불고 있는 한국영화 붐은 갑작스러운 일회적 해프닝이 아니라, 이제 전지구적 단계에 들어선 한국문화의 갱신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하겠다.
이택광 영국통신원/영국 셰필드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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