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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知的 生活'을 꿈꾸며
제대로 된 '知的 生活'을 꿈꾸며
  • 김용규 편집기획위원/부산대·영어영문학과
  • 승인 2015.12.28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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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김용규 편집기획위원/부산대·영어영문학과
▲ 김용규 편집기획위원

19세기 영국 작가이자 예술가인 필립 길버트 해머튼은 자신의 책 『지적 생활』에서 지적 생활과 지적 노동을 구분한 바 있다. 그는 그 구분의 핵심적 기준으로 정서적 만족감을 들고 있다. 그에 따르면, 지적 생활이 자기만족과 학문의 즐거움 자체를 목표로 삼는다면, 지적 노동은 그 즐거움의 전달을 통해 타인의 인정을 얻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해머튼이 이렇게 구분한 이유는 물론 지적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지적 노동과 지적 생활을 구분하려 했을 뿐 분리하지는 않았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마치 수신치국의 연속적 과정처럼, 타인의 평가를 지향하는 지적 노동에 자신의 지적 생활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것과, 자신의 지적 활동과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정서적 만족감이 없다면 지적 노동은 정신적, 육체적 소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한 지적 노동은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힘을 소진케 하기 때문에 운동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산책과 걷기를 제안했다.

매슈 아널드, 존 러스킨, 윌리엄 모리스, 존 스튜어트 밀 등 위대한 영국 지성인들이 이 시대에 대거 활동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 지적 노동의 근간에 이들 나름의 건강한 지적 삶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지적 노동이란 자신들의 지적 삶의 확장이자 그 희열과 쾌감의 전파 과정이었다. 그렇기에 지적 삶은 일상적이면서도 공적이었고, 나아가 영웅적이었다. 특히 지적 생활은 그 사람의 지적 향기가 주변세계를 감염시키는 예술적 활동에 다름 아니었다. 삶의 예술화, 바로 그것이 지적 생활의 존재이유였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학문적 현실은 어떤가. 특히 대학의 지적 활동은 어떠한가. 지적 생활과 지적 노동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단절이 생겨버렸다. 지적, 학문적 활동은 양적으로만 평가되고, 그 자체의 우수성보다는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을 통해 자신의 위치가 등급으로 매겨질 뿐이다. 이런 현실에선 타인을 위한, 더 정확히 말해, 타인의 점수를 겨냥한 나 자신의 지적 노동만 의미 있을 뿐 나 자신의 지적 활동에 의한 만족감을 얻기란 쉽지 않다. 반대로 타인의 지적 활동에서도 어떠한 향기도 감동도 느낄 수 없다. 글쓰기가 재미없고 나날이 힘들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자기만족과 정서적 쾌감이 없는 지겨운 노동의 일부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적 노동은 더 이상 지적 생활의 확장이 아니다. 오히려 지적 생활은 지적 노동을 수행하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축소됐거나, 지적 노동으로 인해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한 사적인 여가 활동으로 변하고 말았다. 수많은 이들이 기본 생계조차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지적 생활이란 말을 꺼내기가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지적 생활의 위축과 변형은 지적 노동에도 큰 변화를 낳고 있다. 지적 노동은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말 그대로 만족감 없는 곤혹스런 노동이 되고 있다. 결국 지적 생활과 지적 노동의 순환이 단절되면, 사람들 간의 정서적 즐거움과 감동의 순환 또한 멈추게 된다. 이제 지적 노동의 고단함은 무엇으로 해소할 수 있을까.

최근 퇴임을 했거나 앞둔 원로교수님들로부터 위로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학교를 떠나는 분께 위로를 해드려도 시원찮은데 상대적으로 젊다는 이유로 위로받는 처지가 됐다. 그 위로 이면에는 ‘나는 이제 고단한 지적 노동으로 벗어난다’는 안도감이 자리하고 있다. 젊다는 것이 위로받아야 하는 시대라면, 그 시대는 삶을 삶답게 살지 못하는 시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월든』에서 자신이 숲으로 들어간 이유를 삶의 핵심적 사실을 직시하고 삶을 뜻대로 살아봄으로써 ‘횃대 위에 올라앉은 아침의 수탉처럼 한번 호기 있게 울어보기’ 위해서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성공 가능성은 별로 없겠지만 다가오는 새해에는 제대로 된 지적 생활을 한번 꿈꾸어보고 싶다.

 

김용규 편집기획위원/부산대·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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