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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등에서 시작된 동서교류 … 유럽, 茶와 도자기에 열광하다
낙타 등에서 시작된 동서교류 … 유럽, 茶와 도자기에 열광하다
  • 교수신문
  • 승인 2015.12.15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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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53. 문명의 전파와 교류, 사람만이 주역은 아니었다

 실크로드를 따라 길을 떠나기 전 도자기를 짚으로 싸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공 모양 덩어리로 만든다. 그 다음 새끼줄로 묶고 서로 연결해 낙타 등에 얹는다. 이렇게 해야 험준한 산길 같은 곳에서 낙타 등에 짊어지운 짐이 떨어질 가능성이 낮다.

 

▲ 원나라 때 청화백자 접시

“나의 형제여, 그대의 사상과 감정의 배후에는 하나의 강력한 통치자, 하나의 알 수 없는 賢者가 서 있으니, 그는 ‘自己’ 라 불린다. 그는 그대의 육체 안에 산다. 그는 그대의 육체이다.”
―니체,『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중에서

 

중앙아시아 인문학기행이 끝나가는 시점이다. 2년의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애당초 40회 연재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글쓰기였으나 부득이 55회까지 연장했다. 이제 3회분의 글 속에 나머지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 이번 글은 동양의 문명이 서양에 전파된 사례를 살피는 가운데 문명의 교류에 이바지 한 존재가 인간만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요즘은 대형 화물열차가 잘 닦인 아스팔트 도로를 내달리며 화물을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실어 나른다. 구태여 뜨겁고 어두운 카라부란(Karaburan, 黑風) 부는 사막길을 갈 필요도 없고, 산이 높고 험하면 비행기를 타고 넘으면 된다. 과거에는 사정이 달랐다. 열사의 사막도 목숨 걸고 건너야 했고, 눈덮힌 설산도 죽을 힘 다해 넘어야 했다. 사람이 짐을 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돈 되는 곳이라면 지옥까지라도 갈 태세를 갖춘 장사꾼들도 사막과 설산 앞에서는 늘 겁이 나고 주눅이 들었다. 그럼에도 돈벌이가 되는 교역품, 이윤이 많이 남는 재화는 가급적 많이 운반해야 했다.

▲ 쌍봉낙타

낙타가 제격이었다. 페르시아 속주였다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정벌군에 의해 점령당한 뒤 그리스의 식민지가 된 박트리아에 낙타가 있었다. 아라비아 낙타처럼 단봉이 아닌 쌍봉의 이 낙타는 사실은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에 두루 서식하고 있었다. 현재에도 고비 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에, 카자흐스탄 초원에, 인도 북서부 잠무-카시미르의 그림 같은 계곡과 라다크의 누브라 계곡 등지에 야생 상태로 살고 있다. 야생 박트리아 낙타를 처음 언급한 사람은 19세기말 제정 러시아 황제의 명을 받고 만주는 물론 중앙아시아 탐사에 나선 러시아 장교 니콜라이 프레츠발스키(Nikolay Przhevalsky)였다. 발굽이 평평하고 힘이 좋은 박트리아 낙타는 추위와 갈증을 잘 견디고 고지대에서도 끄떡없다. 이 쌍봉의 낙타가 실크로드를 오가는 카라반들의 여정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 ‘아라비아인들의 낙타’라고 기술한 단봉낙타를 dromedary camel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그리스어 δρομὰς κάμηλος(dromas kamelos)에서 비롯됐다. 그 말뜻이 ‘달리는 낙타(running camel)’인 것으로 보아도 애초 이놈은 화물수송보다는 사람을 태우고 달리는 승용 낙타로 적합하다. Dromedary라는 말은 ‘빠르다(swift)'라는 의미의 라틴어 dromedarius가 고대 프랑스어 dromedaire를 거쳐 탄생한 것이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뿌연 모래바람 날리며 말처럼 달리는 아라비아 낙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경덕진 청화백자 개완

때론 말이 필요했다. 아니 필요 그 이상이었다. 유목민에게 말은 필요불가결한 존재였다. 장거리 이동은 물론 전투에도 빠질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이었다. 고선지 장군이 힌두쿠시를 넘을 때 병사 한 명에게 제공된 말은 세 마리였다. 말이 없으면 전쟁도 힘들고 사람의 이동도 답답했다. 빠른 속도로 정보를 전달할 수도 없다. 단적인 예가 마라톤 전투의 승리 소식이다.

곧 들이닥칠 페르시아군에 의해 참담하게 살육당할 생각에 가슴만 쥐어뜯고 있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낭보가 전해진다. 기원전 490년 9월 그리스 이타카 북동부의 마라톤 평원에서 벌어진 제1차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 전쟁에서는 누가 봐도 페르시아군이 이겨야 했다. 1만1천의 아테네와 플라타이아이 연합군의 주 병력은 팔랑크스라는 중무장한 보병, 다리우스 1세가 지휘하는 페르시아군은 경무장 보병과 경기병 위주의 2만5천명. 결론을 말하자면, 페르시아 군 6천400명 전사, 아테네는 지휘관 칼리마코스를 포함 192명 사망. 그리스 군대는 예상치 않는 승리에 놀라 죽을 지경이었다.

밀티아데스 장군은 승리 소식을 전하기 위해 연락병을 보낸다.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42km를 달린 연락병은 아테네 포럼(forum, 광장)에 도착해 ‘나이키(nice 승리)!’를 외치고 쓰러져 죽었다. 올림픽에서의 마라톤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승리에 취한 아테네는 기념사업으로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고대 세계에서 가장 음전한 파르테논 신전을 건설했다.

제지술이 서방으로 넘어간 건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군에게 패한 결과였다. 오랜 시간과 긴 경로를 거쳤지만 제지술의 전파는 서방세계에게는 축복이었다. 때가 돼 인쇄술이 제지술과 결합됐다.

중국의 茶가 천산을 넘고, 험하디 험한 히말라야를 지나 페르시아를 거쳐 아랍 세계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은 차는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유럽으로 진출한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됐던 아시아의 차가 인도양을 건너고 아라비아해를 거쳐 마침내 지중해에 면한 유럽 항구도시에 당도한다. 그리고 특유의 매력으로 유럽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인도와 스리랑카의 차가,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의 차가, 일본과 중국의 차가 뱃길로 먼 항해 끝에 대서양의 섬나라 영국에서 우아한 차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다. 후일 이들의 격식 갖춘 세련된 차문화는 동양으로 돌아와 홍콩, 상해 등지의 호텔에서 딤섬문화로 발전한다.

동양을 접한 서양은 그야말로 야단법석, 난리가 났다.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이면 그것이 도자기든 비단이든 차든 누구나 소유하고 싶어 했다. 중세에 베니스 상인들이 그러했듯, 근세에 이르러 아랍과 인도와 중국 상인들이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춰 동양의 물자를 고가에 공급했다. 12세기의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한 19세기 말의 러시아 오페라 「사드코(Sadko)」에도 바다를 건너온 외국 상인들이 나온다. 작곡가 림스키 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가 오페라에 등장시킨 인물들은 바랑고이(the Varangian) 즉 바이킹 상인, 인도 상인(the Indian), 베니스 상인(the Venetian)들이다. 실제로는 이들과 거래하는 러시아 상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서양에는 없는 차가 소그드 상인들의 손을 거쳐 페르시아로, 아랍으로, 유럽으로 전해진다. 차와 함께 찻그릇이 따라왔다. 식기류도 들어왔다. 따라서 서양의 문화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게 된다. 덕분에 중국 강서성 북동부에 위치한 景德鎭(Jing de Zhen)에서는 도자기 산업이 발전했다. 청화백자가 유럽 황실과 귀족, 부유한 상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때문이다. 인구 50만 중 30% 이상이 도자산업에 종사한다는 명실상부한 도자도시 경덕진은 원대 관요로 지정된 이후 오늘날까지 중국을 대표하는 요장들이 성업 중에 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瓷都’(도자기의 도시) 경덕진은 중국 정부가 제일의 역사 문화도시라고 자랑할 정도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도자기의 품질과 예술적 가치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유럽인을 놀라게 한 동양의 보물은 다름 아닌 청화백자였다. 그리고 경덕진은 청화백자의 고향이었다.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고기술의 瓷器 제품을 두고 서구인들은 애가 탔다. 이토록 아름다운 물건을 본 적이 없는 유럽인들은 경쟁적으로 도자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 명나라 시대 용문양 청화백자

청화백자는 초벌구이 한 백자에 코발트 안료를 사용해 장식한 후 백자 유약을 발라 구운 그릇을 말한다. 9세기경 이란 지역에서 기원해 14세기 중국 元代에 형식이 완성됐다. 당시 코발트는 중국에서도 지금의 이란과 이라크 지역에서 수입했고 우리나라는 중국을 통해 재수입을 해야 했다.

2천여 년 전 중국의 대표적 특산품이 비단이었다면, 천 년 후의 중국산 고부가가치 상품은 도자기였다. 비단은 한나라 시절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페르시아와 로마까지 유입됐다. 흉노와 월지가 중개역할을 했다. 천 년 전 도자기는 당대 최고의 고기술 상품이었다. 따라서 최대의 국제 교역 상품이 됐다. 도자기는 기존의 육상 실크로드를 활성화 시키는 한편 바다의 실크로드, 대항해시대 차이나 루트를 열었다. 도자기 교역을 위해 포르투갈은 희망봉을, 스페인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중국을 찾는다. 이슬람이 세상을 지배하던 때다.

동서교역으로 수천만 점에 이르는 도자기가 동아시아에서 이슬람을 거쳐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다. 독자적 기술을 갖지 못한 이슬람은 중국에 새로운 안료인 코발트를 제공함으로써 도자산업의 혁명을 이뤄냈다. 신비한 백자를 부러워하던 유럽은 마침내 ‘본 차이나’를 탄생시켜 도자기 시장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이 진귀한 도자기는 어떻게 운반했을까. 일단 중국에서 도자기를 구입한다. 실크로드를 따라 길을 떠나기 전 도자기를 하나하나 짚으로 싸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공 모양의 덩어리로 만든다. 그 다음에는 새끼줄로 묶고 서로 연결해 낙타 등에 얹는다. 이렇게 해야 험준한 산길 같은 곳에서 혹시 낙타 등에 짊어지운 짐이 떨어질 가능성이 낮을뿐더러 만약 떨어진대도 여간해서는 깨지지 않는다. 장시간에 걸쳐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면 낙타 등에 실린 둥근 진흙덩이를 내려 물에 담그면 진흙이 물에 풀리며 값비싸고 고귀한 도자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식으로 건조하고 무더운 사막을 건너고 불원천리 험준한 산길을 오르내린 끝에 목적지에 당도한 도자기는 조만간 자신을 애인 기다리듯 기다리던 사람들의 품으로 들어간다. 값은 문제가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 시절 중국 도자기는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만큼 값비싼 것이었다. 나무나 쇠붙이로 된 접시를 식기로 사용하던 사람들이 우아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도자기를 사용하자마자 한 순간에 그 매력에 흠뻑 빠졌다. 몰랐다면 몰라도, 도자기를 한 번 접해본 사람이라면 결코 떼어 놓을 수 없는 생활 용기가 됐다. 문제는 나날이 증가하는 수요를 공급이 따라오지 못했다는 것. 생산지인 중국은 너무도 먼 곳이었다. 상인에게 주문을 해놓고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형국이었다.

옛 비잔틴 제국의 수도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 됐다. 여기 금각만 언덕에 톱카프 궁(Top Kap Saray)이 있다. 톱카프 궁은 이 도시를 장악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 황제 메흐메드 2세가 세운 것으로 15세기 중순부터 19세기 중순까지 약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군주인 술탄(Sultan)들이 거주한 궁전이다. 이스탄불 구시가지가 있는 반도,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금각만이 합류하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 중이다. 총 면적은 70만 평이며, 벽 길이만도 5km나 된다. 톱카프 궁은 유럽의 다른 궁들과는 달리 화려하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이곳의 주인이던 술탄은 보석과 더불어 중국 도자기 수집으로 유명했다. 현재 톱카프 궁 내 도자기 전시실에는 무려 4만여 점, 정확히는 4만512점의 도자기가 소장돼 있다. 이 가운데 중국의 청화백자만 700점이 포함돼 있다. 당시 청화 접시 한 개의 가격은 쌀 66가마를 살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금액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동양의 도자기는 이슬람 군주들과 유럽 황실과 귀족들의 애호품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원산지격인 동방에서 소홀한 대접을 받았을 리는 없다. 흰색을 선호하는 몽고의 전통에 따라 원나라는 백자를 황실자기로 사용했다. 푸른색을 상서로운 빛깔로 여기는 이슬람은 청화백자에 완전 매료됐다. 요즘은 가기 어렵지만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 자리한 우마야드 모스크의 도자기 타일 장식은 이들이 얼마나 도자기를 좋아했는지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란 이스파한의 블루 모스크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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