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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휴머니즘 재평가 작업 … “학술대회는 국제적 네트워크 구축 노력의 성과”
근대적 휴머니즘 재평가 작업 … “학술대회는 국제적 네트워크 구축 노력의 성과”
  • 신상규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철학
  • 승인 2015.10.27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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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을 넘어서’ 국제 학술대회를 마치고
▲ 왼쪽 팔에 제3의 귀를 이식해 세계를 경악시켰던 호주의 행위예술가 스텔락 교수

지난 15일부터 18일까지 이화인문과학원 주최로 ‘휴머니즘에서 포스트-, 트랜스휴머니즘으로?’라는 제목의 국제학술대회가 이화여대에서 개최됐다. 이 학술대회는 기술과학의 발전이 만들어 내는 ‘인간’의 변화에 직면해 그것에 주목하는 현대철학 및 예술의 양상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세션 발표 수가 50여개, 발표자의 국적이 22개국에 이르는 대규모의 학술대회였다.

이번 학술대회의 중요한 특징 한 가지는 학술 논문의 발표뿐 아니라 예술적 퍼포먼스나 첨단 기술의 시연이 함께 이뤄졌다는 점이다. 호주의 유명한 행위 예술가 스텔락은 대회 첫날에 기조발표를 맡아서 기술을 통한 인간 신체의 확장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둘째 날에는 ‘신체 없는 기관’이라는 제목으로 제2의 삶(second life)을 상징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스페인의 하이메 델 발은 대회 삼일 째 저녁에 신체의 비정형적인 움직임에 대한 메타보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한편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톰 크루즈가 보여준 시각-제스처 인터페이스의 특수 효과를 담당했던 데일 해릭스태드는 새로운 3D 인터페이스 기술에 대한 시연과 더불어 증강현실의 향후 전망을 소개했다. 미국의 유명한 매체 이론가인 마크 핸슨 듀크대 교수는 두 번째 기조발표를 통해서 기술적인 것의 매개가 포스트휴먼에 대한 규정에서 결정적인 요소임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서구 중심의 포스트휴머니즘 논의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인간의 미래를 예견하고 평가하려는 동아시아 세션을 별도로 준비했는데, 홍성욱 서울대 교수와 하세가와 유코 일본 도쿄 현대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왕지엔위안 홍콩 슈런대학의 영문학 교수가 패널로 참가해 발표하고 토론했다. 본격적인 학술행사가 시작되기 전인 12일에는,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포스트휴먼 연구 워크숍’을 열어서 20여명의 젊은 후속세대와 함께 미래의 기술과 인간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포스트휴머니즘·트랜스휴머니즘이 무엇인가에 대한 스테판 조르그너의 강연에 이어서 이화인문과학원의 교수들이 토론에 함께 참여했다. 조르그너 교수는 한국 학생들의 높은 수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이화인문과학원에서 이런 큰 학술행사를 치러 낸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대회조직자의 한명으로서 이번 학술대회를 치러낸 소회 또한 남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학술대회의 컨셉을 정하고 논문투고 초청장을 발송하는 등 학술대회의 구체적인 준비를 시작해온 과정도 결코 짧다할 수 없는 1년여의 시간이지만, 이번 학술대회의 단초는 훨씬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화인문과학원은 2007년부터 ‘탈경계 인문학의 구축 및 확산’을 어젠다로 한국연구재단에서 지원하는 HK지원사업을 수행해 왔다. 탈경계 인문학은 “21세기 지식, 기술, 문화 환경의 변화에 적극 대응해, 전통적인 학문이나 학제의 경계, 지역이나 민족, 문화, 젠더의 경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인문학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시도”다. 그런데 이 같은 일반적 규정은 지향해야할 연구의 방향성은 보여주지만, 구체적으로 다뤄야 할 특정의 연구 주제나 쟁점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탈경계 인문학’이란 우산 아래에서 무엇을 연구할지를 두고 연구자들 간에 치열한 고민과 토론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한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포스트휴먼’이다.

▲ 이번 학술대회에서 첫 번째 기조발표를 맡아 인간 신체의 확장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탈경계 인문학’과 ‘포스트휴먼’

생명공학, 정보공학, 로봇공학과 같은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활공간을 급격하게 변화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증강기술이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인간 몸의 변화나 진화 혹은 포스트 휴먼의 출현이라는 전망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아직도 많은 부분 근대적인 휴머니즘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 발전의 새로운 양상은 인간·동물, 정신·신체, 유기체·기계, 물질·비물질의 전통적인 경계를 빠르게 해체하면서, 일상적인 인간 이해의 방식이나 거기에 동원되는 범주 자체의 유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이러한 점에 착안한 연구팀은 급변하는 테크놀로지 현실에 의해서 야기된 새로운 인간 조건을 설명하고 포착하는 ‘포스트휴먼’ 연구가 탈경계 인문학의 중요한 한 축을 이뤄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이에 따라 철학, 문학, 문화사회학, 미술사학, 매체학 및 기술사 등의 학제 연구를 기반으로 하는 ‘포스트휴머니즘’ 연구팀이 꾸려졌다. 그것이 2010년 무렵의 일이다. 현재 우리 연구단은 탈경계 인문학 연구의 구체적 일환으로 포스트휴머니즘 연구팀과 함께 탈경계 지식형성 연구팀을 운영하고 있다.

이후 이화인문과학원의 포스트휴머니즘 연구팀은 포스트휴먼 연구를 위한 콜로키움이나 학술대회 개최, 국제적인 학술 네트워크의 구축, 포스트휴먼 담론에 대한 연구 성과를 담은 『포스트휴먼 총서』(아카넷)의 발행과 같은 다양한 학술 활동을 수행해 오면서, 포스트휴먼 관련 연구나 교류의 국제적인 허브로 부상하고 있다. 이번 학술대회는 그 동안 기울였던 다양한 노력의 결실을 확인하는 자리인 동시에, 향후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자기 점검의 기회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번 학술대회는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포스트휴먼·포스트휴머니즘 연구자들의 모임인 ‘Beyond Humanism Network’와 공동으로 기획됐다. 독일의 스테판 조르그너를 중심으로 설립된 BHN은 이미 2009년부터 매년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휴머니즘을 넘어서’라는 학술대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2011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개최된 제3회 학술대회에 참석해 처음 교류를 시작한 이래로, 이화인문과학원은 BNH와 연계된 스테판 조르그너, 줄리언 사블레스쿠, 마이클 하우스켈러와 같은 학자들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유럽 BHN·파리 8대학 라벡스 연구팀과 협력

이번 학술대회의 또 다른 중요한 한 축은 프랑스 파리 8대학의 라벡스(LABEX) 연구팀이다. 인문학과 예술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는 라벡스팀은, 이화인문과학원과 ‘디지털 주체와 포스트휴머니즘’이란 제목으로 2년간의 공동 연구를 수행했고 프랑스와 한국에서 각각 공동 저서를 출판한 바 있다. 이번에는 샤를르 라몽과 아르노 레뇨를 비롯한 4명의 라벡스팀 연구자가 한국을 찾았다. 제7회 ‘휴머니즘을 넘어서’ 학술대회를 유럽이 아닌 동아시아, 그것도 이곳 서울, 이화여대에서 개최하고 수십 명의 외국 학자들이 자비를 들여 찾아오게 된 것은, 그 동안 기울였던 이러한 국제적 네트워크 구축 노력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학술대회는 2007년 시작된 인문한국 사업의 지원에 힘입어 그 동안의 연구 성과가 집적되고 국제화 노력이 결실을 맺으면서 가능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행사는 이와 같은 성과의 중간 점검으로서 의의를 갖는다.

이화인문과학원은 스테판 조르그너 및 미국의 제임스 휴즈 등과 협력해 내년에는 포스트휴먼 연구에 특화된 <Journal of Posthuman Studies>라는 국제 학술지를 창간할 예정이다. 스텔락을 비롯해 줄리언 사블레스쿠, 케서린 헤일즈, 볼프강 벨쉬, 케빈 워릭, 지아니 바티모, 에두아르도 칵과 같은 저명한 학자와 예술가들이 이미 편집위원으로 참여할 것을 확약했으며, 현재는 미국의 한 대학 출판사와 저널 출간을 위한 마지막 과정인 계약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을 통해 이화인문과학원은 인간과 기술의 상호 관계, ‘인간적인 것’의 재정립, 근대적 휴머니즘에 대한 재평가 등을 중심으로 하는 포스트휴먼 담론의 세계적인 허브로 계속 발전하게 될 것이다.

신상규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철학

미국 텍사스대(오스틴)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확장된 인지와 자아, 인간 향상, 트랜스휴머니스즘, 포스트휴머니즘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호모사피엔스의 미래―포스트휴먼과 트랜스휴머니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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