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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와 데이터, 그리고 이론
정보와 데이터, 그리고 이론
  • 교수신문
  • 승인 2015.10.19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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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읽는 신간_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110쪽|10,000원

얼마 전 <와이어드(Wired)>지의 편집장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이 「이론의 종말」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여기서 그는 이제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활용 가능해짐에 따라 이론적 모델은 완전히 불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이론을 버려라. 분류법도, 존재론도, 심리학도 모두 잊어라.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누가 안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다는 사실이고, 우리는 사상 유례없이 정확하게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추적하고 측정할 수 있다.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앤더슨의 테제의 근저에는 허약하고 단순화된 이론 개념이 깔려 있다. 이론은 실험으로 검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가설이나 모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헤겔의 정신현상학 같이 강한 이론들은 데이터의 분석으로 대체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니다. 이러한 이론들은 강한 의미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다. 이론은 세계를 완전히 다르게, 완전히 다른 빛 속에서 드러나게 하는 근본적 결단이다. 이론은 무엇이 여기에 속하고 무엇이 속하지 않는지, 무엇이 존재하고―혹은 존재해야 하고―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원천적, 근원적 결단인 것이다. 이론은 고도로 선택적인 서사이며, ‘전인미답의 지대’를 헤치며 열어가는 구별의 숲길이다.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사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터가 작동시킬 수 있는 것은 그저 계산일 뿐이다. 사유에는 계산 불가능함이라는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그리하여 사유는 ‘데이터’, 즉 주어져 있는 것보다도 더 이전의 차원에 속한다. 사유는 사전에 주어져 있다. 사유의 바탕을 이루는 이론은 사전 선물이다. 이론은 주어져 있는 것의 긍정성을 초월하며 이를 돌연 새로운 빛 속에서 나타나게 한다. 그것은 어떤 낭만주의도 아니며, 사유가 시작된 이래 변함없이 관철돼온 사유의 논리다. 오늘날 학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데이터와 정보의 더미에 휩쓸려, 이론과 사유에서 아주 멀리 떠나가고 있다. 정보는 그 자체 긍정적이다. 데이터에 바탕을 둔 실증과학, 데이터를 비교하고 평균을 내는 게 전부인 실증과학은 강한 의미에서의 이론에 종언을 고한다. 그러한 과학은 서사적이기보다 가산적이고, 해석학적이기보다 폭로적이다. 여기에는 전체를 관통하는 서사적 긴장이 없다. 그리하여 실증과학은 단순한 정보들로 해체된다. 정보와 데이터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오늘날 오히려 이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하다.

 

1994년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000년에는 스위스 바젤대에서 데리다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한 저자는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있다.  『피로사회』, 『투명사회』 등의 문제작을 썼다. 알랭 바디우는 이 책 서문에서 “앞으로 다양한 토론과 논의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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